류제곤 목사 [합덕제일교회]
겨우내 움츠렸던 나무의 새순을 움트게 하려는 매서운 꽃샘추위의 기세가 꺾이면 나뭇가지에는 연한 순이 돋아나게 되고 연한 순은 점점 커져서 가지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에서 두 번째 세 번째 가지가 연이어 돋아난다.
첫 번째 가지가 제일 먼저 나왔다면 응당 맨 위쪽에 자리 잡으며 버티고 있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맨 먼저 나온 가지는 언제나 맨 밑에 자리 잡고 있고, 제일 위쪽 가장 돋보이는 자리는 최후에 나온 가장 약한 가지가 차지한다. 만약 첫 번째 가지가 자신이 가장 오래되고 굵다고 하여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면 나무는 그 가지의 무게로 인해 찢어지고 꺾어질 수밖에 없다. 가지들이 모여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 위해 가지들은 예외 없이 다른 가지를 위해 기꺼이 밑가지가 되어준다.
의미심장한 것은 열매는 새 가지에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열매는 지난해 나온 가지에서 꽃대가 형성되어 꽃이 피고, 꽃이 지고나면 그 자리에서 열매가 열린다. 탐스럽게 자란 열매의 무게를 지탱해 내도록 설계된 오묘하신 하나님의 작품인 듯싶다. 가장 돋보이는 자리, 푸름을 뽐내는 자리,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리는 새 가지에 양보하고 묵은 가지는 새 가지 뒤에 살포시 숨어서 열매 맺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자리의 철학’ 이라는 말이 있다. 먼저 나온 나뭇가지들이 밑가지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새 가지를 맨 위에 올려 푸름을 뽐내게 하듯이 사람이라면 앉을 자리, 설 자리, 다가설 자리, 물러설 자리, 가야 할 자리, 가서는 안 될 자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다는 몰라도 교계의 정치판(?)을 보면 자리의 철학이 무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2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서 그 자리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그 인물이 그 인물이다. 새 가지를 위해 묵은 가지들이 밑가지가 되어주어야 아름다운 법인데 새 가지들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묵은 가지들이 버티고 있으니 새 가지들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는 다는게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간혹 간신히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새 가지가 있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아 보인다. 정착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약삭빠르게 행동을 해야 겨우겨우 살아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게 자리의 철학이 무색한 곳에서 무엇을 기대해야한단 말인가?
필자가 어릴 적 출석한 교회에 담임목사청빙할 때의 일이 생각난다. 청빙위원장 장로님은 국회의원을 역임하셨고 우리교회를 사임하시고 큰 교회로 가셨던 목사님 보다 부흥회를 더 많이 나가셨던 소문난 장로 부흥사로 은혜 체험이 확실하고 겸손이 몸에 배여 있을 만큼 인품이 좋으셔서 학생들의 롤 모델이었다. 갑자기 담임목사 자리가 공석이 돼서 교회는 소속 지방회에 청빙 공고를 내게 되었고 여러 목사님들의 이력서가 접수되었다.
농촌교회지만 장년 출석교인 이백여 명이 모였으니 교세를 보고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이 지원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청빙위원장이셨던 장로님께서 교인들 앞에서 발표한 내용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우리교회 담임목사는 우리 지방회에 계시지만 우리교회에 오겠다고 이력서를 접수하지 않은 00교회 김00 목사를 청빙하기로 했습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지만 수락할 때까지 설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교회 담임목사로 오시겠다고 이력서를 제출한 목사를 모시게 되면 전에 계셨던 목사님처럼 큰 교회의 자리가 나면 쉽게 떠날 것이지만 지금까지 고수하고 계시는 김00 목사님은 지금 사역하고 계시는 교회를 쉽게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신 것을 보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까지 설득해서 모셔오겠으니 믿고 기다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교회는 오랜 설득 끝에 ‘자리의 철학’이 분명한 목사를 담임으로 모시게 되었던 적이 있다.
성 총회를 앞두고 있다. 정치가 배재된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겠지만 ‘자리의 철학’이 없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정치를 위한 공동체는 되지 않았으면 하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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