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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 목사 [예미향교회]

예배 강단 꽃꽂이 대신에 때로는 서양 난 화분들을 놓곤 했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했고 꽃이 질 때는 떨어진 꽃잎들을 주워 모으면서 보기에도 좋고 덜 싫증나며 저렴한 다른 꽃 화분들을 사용할 수 없을까? 한 대안으로 꽃봉오리가 올라와 있는 두세 그루 장미를 한꺼번에 큰 토기 화분에 옮겨 심고 좋은 거름흙을 더해서 좌우에 놓을 수 있는 두 개의 큰 장미화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을 때때로 적당히 주며 장미가 그 화분에서 잘 자라고 예쁘고 화려한 꽃을 계속 피워주기를 고대했다. 여러 날이 지나자 본래 꽃봉오리졌던 장미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장미꽃들은 색이 변하고 잎들은 상처 입은 흔적처럼 점들로 얼룩지더니 서서히 생명의 기세가 꺾여 고사되어 갔다. 꽃 화분에 대한 경험 지식이 전무한 나로서는 좀 당황스러웠다.

왜일까? 좋은 환경으로 옮겨 심었는데 왜 서서히 죽어 갈까? 꺾꽂이 하면 줄기에서 뿌리도 나서 자라 꽃을 피우는데 왜 죽어 갈까? 급기야는 줄기를 잡아당겨보는 실수를 했는데 뿌리는 힘없이 뽑혔고 새 뿌리가 나지 않은 채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죽이기 아까워 뽑혀진 장미 줄기들을 한 손에 다발로 쥐고 뿌리와 밑동만 남긴 채 잘라 그대로 화단에 버리듯이 흙을 덮어두었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주먹 쥐어서 그대로 심은 장미 그루터기 줄기에서 보란 듯이 파란 싹들을 내어 파란 덩어리로 자라 올라오고 있었다. 이것이 생명력의 원리임을 깨달으면서 내면에는 안개 같은 한 막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타의에 의하여 꽃봉오리, 잎, 가지, 줄기 등에 해당하는 성취, 성공, 겉모양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겪을 수 있다. 수십 년 축적해둔 경제력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고 평판과 명예를 훼손당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을 수도 있고 건강까지 무너질 수도 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말씀들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보다 깊은 생명의 신비 속에 살고 있다. 지금까지 이룬 인생의 모든 것이 다 잘려나가고 밑동만 겨우 남아 생존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어도 결코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인생의 밑동과 그 밑동 속에 생명력이 남아 있다.

부실한 뿌리로 이미 자라버린 꽃봉오리, 가지들, 줄기들, 잎들을 먹여 살리고 지탱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이 상태에서 스스로 자신을 자를 수 없을 때 타의에 의하여 잘려나가니 그것은 참으로 축복이다. 이제는 남은 밑동이, 그리고 그 밑동 아래에 있는 뿌리가 있어 생명력을 재생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아, 그렇다! 인생의 밑동과 그 아래의 뿌리는 인생생명의 신비가 있고 풍요로운 사유의 원천이 있는 곳이다. 지상의 것, 땅위에 것, 안전한 삶을 보장하는 것, 표면적인 것을 잃으면 내면적인 것, 생명의 본질의 것이 깊어지고 풍요로워 진다. 그런 처지로 떨어진 목사는 사유가 풍요로워지고 진리의 본질 꿰뚫는 통찰의 힘이 탁월해진다. 통합된 사고의 바탕위에 인문학의 이해가 깊어지면서 진리를 담은 글쓰기가 가능해지고 만인이 공감하는 강론을 쏟아 낼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식물이 밑동과 뿌리만 남아 심겨졌을 때 싹을 내거나 자라기를 포기하고 먼저 뿌리를 내리는 오랜 시간을 갖듯이 우리 인생도 긴 사유의 내면화 시간과 고독의 긴 몰입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생명력의 힘, 사유의 힘을 키워 가야한다. 그런 세월이 길어지고 보다 깊어질수록 좋다.

풍요의 맛, 사람들 위에 굴림의 맛, 안락함의 맛, 성공과 성취의 맛, 뇌물의 맛, 종교권력의 맛, 종교패거리 힘의 맛에 빠져있는 상태로는 진정한 인생생명의 신비와 인생생명의 풍요로움에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이제는 타의에 의하여 모든 것들이 잘리기보다는 스스로 거둬내고 잘라버려 밑동과 뿌리만을 남긴 자유로운 인생이 되면 어떨까?

그런 목사는 얼마나 자유하고 행복할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생명의 능력과 탁월한 사유의 원천을 지닌 주인공이 되려면 자기 자신을 그루터기만 남긴 채 잘리거나 스스로 잘라내라, 그리고 긴 사유의 내면화와 진리와 함께하는 생각의 풍요로운 시간을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