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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성 목사 [초대교회]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중략)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시집『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열림원,2002)-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아직도 이런 고전적인 낭만이 물씬 풍기는 약속을 실제로 가동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시인은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고 합니다.

말이 안 되는 말인데도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첫눈은 연인들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사랑을 알고 평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혁명 같은 그 첫눈을 기다립니다.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겠지요.

어린 시절 눈은 순결과 신비, 설렘과 경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시생활의 이기와 약삭빠름 그리고 세월의 무게에 젖다 보면 감흥은 차츰 떨어지고 때로 눈은 내 교통을 방해하는 성가신 강하물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습니다.

나이를 먹는 자체만으로 감성이 낡아감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첫눈조차 무덤덤해진다면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그래서 눈이 오면 누군가가 더 그립고 보고파 져서 마음은 붐비고 눈송이처럼 불어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리움은 쌓여 가는데 길은 막히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아 근심으로 동당거리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서울 도심에서 어느 눈 오는 밤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과 함께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이 주연한 ‘러브 어페어’(Love Affair)입니다.

호주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엔진 고장으로 조그만 섬에 비상착륙하게 되어, 근해에 있던 러시아 여객선을 타고 타히티로 향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신변 정리 후 3개월 뒤 엠파이어스테이트 전망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지는데 하필이면 아네트 베닝은 약속장소로 가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처럼 어긋나 버리고 약속이 불발된 그 사연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게 됩니다.

통신 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1900년대가 배경이니 지금의 환경과 비교하면 다소 이해가 안되겠지만요. 영화 ‘러브 어페어’는 세 번이나 리메이크된 추억의 영화입니다. 시대와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새롭게 탄생한 고전이지만 ‘신파조’의 스토리가 이 시대에도 먹힐지는 모르겠습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만나서 눈 내린 거리를 늦도록 신나게 걸어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애써 기억을 들추어도 이젠 아슴아슴할 추억이라 기억의 창고에서 희미해진 것 일수도 있을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몸은 늙는데 왜 마음은 늙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는 나이들지 않는 마음들은 어떤 것일까요? 늙지않는 마음이 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기왕이면 아름다운 마음, 선한 마음, 행복한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찾아놓고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2월과 함께 이제 곧 첫눈이 내리겠지요. 그래서 시인의 시를 생각했고 느낌을 끄적여 보았습니다. 다가온 이 겨울이 코로나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계절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따뜻하고 행복한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