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6 (금요일)
총회/기관 지방회 화제&인물 특집 선교&신앙 목회&교육 열린광장 오피니언 교계&문화  
전체보기
특집
기획
다문화
 
 
뉴스 홈 특집 기획 기사목록
 
예성 역사기록에 대한 교회사적 검토와 제언
예성 100년사 대표 집필자 정상운 목사
2018-10-15 오후 4:58:00    성결신문 기자   


올해로 111년이란 장족의 세월을 맞이한 한국성결교회는 아직도 지난 100여년의 과거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신학적 배경, 더 나아가서 역사서술에 있어서 여전히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헌장」을 중심으로 교회사적인 검토를 통해 예성 역사기록에 반영되어야 할 내용들을 제언하고자 한다.

1.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총회 연차대회 횟수 산정문제

1960년대 들어와 한국성결교회는 예성과 기성 두 교단으로 양분되었다. 1961년 지난해 총회에서 결의하였던 NCC와 NAE 두 연합기관 탈퇴안이 보류되고 두 기관에 더 많은 대표단이 파송되자 1962년 4월 24-26일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이하, 예성)총회가 성결교회의 모교회(母敎會)인 중앙성결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예성 개정전권 위원회가 1962년 7월 30일 공포한 헌장전문에는 “5월에 보수총회와 12월에 합동특별 총회를 거쳐, 1962년 4월에 「제17회 총회」시에는 신앙노선의 환원과 아울러 교단 연차 횟수를 교회조직 당시 연대, 즉 1921년으로 환원하여 제 17회 총회를 「성결교회 41회 연차대회 및 총회」로 결정하는 동시에 교단 명칭도 「기독교」를 교회조직 당시 명칭인 「예수교」로 환원하기로 결정하고...” 내용이 들어가 있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위의 헌장전문에서와 같이 기성과 달리 복음전도관에서 성결교회로 교단전환을 한 1921년을 기점으로 하여 1962년 총회를 ‘41회 연차대회 및 총회’로 지금까지 시행해 오고 있는데, 여기에는 횟수 산정의 문제점이 있다.

  2. 성결교회 기원과 연혁에 대한 기록문제

첫째, 동양선교회 설립자 기록 
예성 헌장은 제2절 ‘성결교회’에서 본 교회 이름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라고 정의하고,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 교회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미국인 「C.E 카우만」, 「E.A 길보른」 두 사람이 일찍이 「하나님」께 부름을 입어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실한 체험을 받은 후, 구령에 불타는 심정으로 「요한 웨슬레」의 성경적 복음 신앙을 이어 받아 동양 모든 나라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려는 사명에서 「동양 선교회」를 조직하고 1901년에 일본 동경으로 가서 직접 전도하며, 「성서학원」을 세우고, 전도자를 양성하였는데, 이 학원을 졸업한 전도자들이 귀국하여 전도한 일이 이 교회의 기원이다.” 

그리고 「헌장」 제2절 5 ‘본 교회 기원’에서는 동양선교회(OMS)를 조직하고 1901년에 일본 동경으로 가서 직접 전도하고 성서학원을 세운 자가 미국인 「C.E 카우만」, 「E.A 길보른」 두 사람으로만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달리 보완할 면이 있다. 

둘째,  동양선교회와 19세기 성결운동관계 서술
예성 「헌장」 13쪽에서는 카우만과 킬보른 두 사람이 “구령에 불타는 심정으로 요한 웨슬레의 성경적 복음신앙”을 이어받아 동양의 모든 나라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려는 사명과 동양선교회를 조직”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즉,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는 첫째, 요한 웨슬레의 ‘성경적 복음신앙’을 이어받고, 둘째, 동양 모든 나라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려는 사명에서 창립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기술과 한국성결교회 역사기원에 대한 신학적 배경을 말하는데 있어서는 분명한 한계를 보인다.

셋째, 창립자 이름 순서 기록
예성 「헌장」 제2절 ‘제6조 연혁’을 보면 “1907년에 「김상준」 「정빈」 두 사람이 일본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당시 경성부 종로 염곡(무교동)에 단칸 셋방을 얻고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전도를 시작하였고” 기록되어 있다.

제6조 연혁 1항에 보면,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이름 순서가 김상준, 정빈 순으로 나오나 이것은 틀린 기록이다. 지금까지 성결교회 역사와 관련하여 기성의 「한국성결교회 100년사」를 비롯하여 많은 책에서 김상준, 정빈 순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바른 순서가 아니다. 

3. 검토 및 제언

첫째, 예성 총회 연차횟수 문제에 대한 제언
교단 분립시 기독교를 예수교로 개명한 것은 ‘일제시대의 전통계승’(기성 「한국성결교회 100년사」 884쪽)이 아니라 성결교회 초기의 ‘정체성에 대한 전통계승’이었다. 그러나 명칭 변경과는 다르게 예성의 교단 횟수를 교회조직 당시 연대인 1921년으로 환원하여 제17회 총회를 ‘성결교회 41회 연차 대회 및 총회’로 산정하여 결정한 것은 바른 결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1921년부터 ‘성결교회’ 기성교단으로 전환되면서 총회에 걸맞는 대의 회의체제의 현재와 같은 연차대회 및 총회가 개최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21년 이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1921-23년 교역자 간담회, 1924-28년 교역자회, 1929-32년 연회 개최라는 정치제도 발전에 따라 이것들을 소급하여 현행 ‘총회’의 연장선상에서 그대로 인정한다 해도, 지금의 총회와 같이 대의정치가 반영된 총회였느냐? 하는 모임 성격의 논란보다도 더욱 문제되는 것은 1962년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지 연차대회 및 총회로 간주할 수 있는 대회나 총회 성격의 모임이 아예 개최되지도 않은 해가 있기 때문이다. 1936년 ’하나님의 교회‘ 사건 이전 1935년에는 총회가 개최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935년 제3회 총회는 동양선교회 총본부에 의해 개회벽두 해산처분을 당해 열리지도 못했다. 제3차 총회는 한해 건너 뛴 1936년 3월 17일-22일 경성성서학원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1943년 12월 28일 교단이 일제로부터 강제 해산당한 뒤 부터 해방이 된 1945년 11월 8일 개최된 재흥총회까지 그 어간에는 즉, 1944년에는 총회가 열리지 않았다. 따라서, 1962년 교단분립 시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교단명칭을 환원할 때 교단 연차횟수를 교회조직 당시연대인 1921년으로 단순 산정(1962-1921=41)하여 제17회 총회를 ‘성결교회 41회 연차대회 및 총회’로 결정하고, 이것에 대한 역사적 검토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도 사용하는 것은 반드시 수정이 뒤따라야 한다.

둘째, 성결교회 기원과 연혁 기록문제에 대한 제언
① 동양선교회 나까다 쥬지(中田重治)의 위상 재고
성결교회 창립 100년이 넘은 지금도 교단 「헌장」에는 한국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의 초기 설립자로 카우만과 함께 처음 시작을 할 때 대표적인 중심인물인 나까다 쥬지가 전혀 그 이름조차 언급되고 있지 않다. 1901년 동양선교회가 일본에서 중앙복음전도관으로 처음 시작할 때 창립멤버는 킬보른이 빠진 카우만과 나까다 쥬지 두 사람이었다. 킬보른은 한해 뒤인 1902년 8월 카우만의 요청에 따라 전신기사직을 사임을 하고 일본에 건너왔다. 

동양선교회 제1대 총리는 카우만이 아닌 나까다 목사였다(1908년 4월 조직개편). 카우만과 함께 처음부터 OMS의 설립시 기초를 놓은 나까다는 카우만과 함께 적어도 그 위상을 동일선상에 놓아야 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동양선교회 설립에 대한 “미국인 C.E 카우만과 E.A 길보른” 헌장의 기록은 킬보른 대신에 나까다 쥬지가 들어가든지, 아니면 나까다 쥬지를 이 두 사람과 함께 포함시켜야 균형잡힌 역사서술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편향적인 이러한 역사서술은 이명직 목사의 「朝鮮耶蘇敎東洋宣敎會 聖潔敎會略史」의 영향과 역사에 대한 무관심으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북미선교사 중심의 선교사 사관의 역사서술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② ‘본교회 기원’에 있어서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한 신학적 배경 보완의 필요성
동양선교회는 웨슬레신학이 아닌 일본을 비롯하여 동양의 여러 나라에 사중복음, 즉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가르치고 전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은 성결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웨슬리안 가르침들이 너무 협소해서 교리적 틀만으로 이것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19세기 북미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명직 목사가 「略史」에서 말하는 ‘한국성결교회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19세기 성결운동의 대표적인 단체는 만국성결교회를 말한다. 만국성결교회 즉, 만국성결연맹 및 기도동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 I.H.U.P.L.)은 감리교회 주류로부터 반발, 내지 이탈로 만들어진 단체로서 동양선교회(OMS)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동양선교회는 만국성결교회 뿐만 아니라 기독교연합선교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C&MA)로 부터도 영향(신유, 재림)을 받았는데, 그것의 핵심은 순복음(Full Gospel)으로 일컬어진 동양선교회가 가르치고 전하는 사중복음(the Four?fold Gospel)이었다. 따라서 예성 「헌장」 본 교회 기원에는 19세기 성결운동과 동양선교회(OMS)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배경이 분명히 기록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으로 18세기 요한 웨슬레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동양선교회에 영향을 끼친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한 역사서술이 보완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웨슬레의 가르침을 직접 계승하고 있는 감리교와는 달리 설립목적에 있어서도 동양선교회와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에 대한 가르침과 전파가 그 본래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③ ‘김상준, 정빈’에서 ‘정빈 김상준’으로 창립자 이름 순서 정정 
정빈, 김상준이 아니라 김상준 정빈 순으로 잘못 서술된 것은 처음 1929년에 출판된 이명직 목사의 「朝鮮耶蘇敎東洋宣敎會 聖潔敎會略史」에서 연유되었다. 이후 성결교회 역사기록과 연구에서 이것이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반영되어 심지어 「헌장」에서 조차 김상준이 정빈보다 앞서 기술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역사서술이라고 할 수 없다. 1907년 성결교회 첫 번째 모교회인 무교동교회의 주임교역자는 정빈이었고, 부교역자는 김상준이었다. 김상준은 부교역자로 1907-1912년까지 있었다. 부교역자는 1907-1911년까지 김상준 이외에도 이장하(1908년-1912), 안동원(1910-11년), 그리고 여교역자로 박기반(1919-1920) 최홍은(1910-14년)이 더 있었다. 정빈이 무교정 전도관 주임교역자였을 때 김상준은 부교역자였고, 김상준은 정빈이 무교정복음전도관을 사직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경성성서학원 교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정빈에 이어 무교정 복음전도관의 후임 주임교역자가 되었다.  

쪾 기타: 명칭표기 수정
‘C.E 카우만과 E.A 길보른’은 영문 그대로의 명칭인 ‘C. E. Cowman과  E.A. Kilbourne’이나 아니면 ‘카우만(C.E. Cowman)과 킬보른(E.A. Kilbourne)’으로 표기해야한다. 현행 ‘C.E 카우만과 E.A 길보른’은 영문과 한글 혼용으로서 ‘길보른’은 ‘Kilbourne’에 대한 한글표기도 아니고, 또한 ‘Kilbourne’에 대한 한자명인 길보륜(吉寶崙)도 아니기 때문이다. 

1962년 성결교회 본연의 성경적인 복음신앙으로 환원하려는 교단 신앙정체성 회복과 갱신운동으로 출발한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이 땅에 사중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따라서 지나간 과거 역사에 대한 바른 기록과 이해를 통해 교단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21세기 다원화 사회에서의 선교적 사명과 역할을 더욱 힘 있게 감당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기자 : 성결신문
관련기사
 
 

 
네티즌 의견
전체 0   아이디 작성일
 
의견쓰기
 
다음기사글이 없습니다.
군종 제도의 시작, 6.25전쟁 중 싹터
기획 기사목록 보기
 
  특집 주요기사
은현교회, 선교사 게스트하우스 ..
폐암4기 -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
1.평생교육원 지상강의-회복과 ..
3.평생교육원 지상강의-회복과 ..
2.평생교육원 지상강의-회복과 ..
고난의 현장 - 목신교회
부활은 OOO이다
제1회 고양지방회 정기지방회 개..
 
 
가장 많이 본 뉴스
  사 설
회사소개 광고안내 이용약관 개인보호취급방침 이메일수집거부


[110-091]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29ㅣ대표전화 : 02-732-1286ㅣ 팩스 : 02-732-1285 ㅣ등록번호: 문화 다 06518
발행인: 윤기순 ㅣ사장직무대행: 편집국장 조석근 ㅣ편집인: 이강춘
Copyright ⓒ 2009 SKNEWS. All rights reserved. Contact: news@sknew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