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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
3·1운동과 한국성결교회
2019-03-01 오후 5:27:00    성결신문 기자   


| 여는 글 |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성격을 결정하는데도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즉, 개화, 근대화, 민족운동 등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한국기독교는 한국사회에 대한 강한 책임과 사명을 그 역사적 전통으로 남겨 놓았다.

지금까지 한국민족운동 중의 하나인 3·1운동에 대해 한국성결교회가 참여한 과정과 역할에 관련된 본격적인 논문이 2001년 이전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역사적 시점에서 한국성결교회의 민족운동을 3·1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한국성결교회가 나아갈 역사적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1.  성결교의 3·1운동 참여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민족주의적인 항일의식으로 더욱 강하게 표출되어 1919년 3월 1일에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한 3·1운동으로 나타났다. 3·1운동은 일제의 주권침략과 무력적 강제 점령으로 인해 형성된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 민족이 독립 역량을 발휘해 일으킨 항일투쟁이었다. 

1919년 당시 약 1,700만 한국인 인구 중에 개신교 신자 수는 219,220명으로 다른 기존 종교에 비해서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약세이었지만,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여타 어느 종교보다도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성결교회의 3·1운동 참여는 지금까지 본격적인 연구를 통하여 그 전말이 드러난 적이 없다. 그것은 지금까지 3·1운동에 대한 연구가 주로 장로교, 감리교를 중심으로 연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민족운동에 대한 성결교회의 비정치화 태도에도 기인하는 점도 없지 않다.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이승훈, 이갑성등 평신도 지도자들이 적극성을 띤 반면에 길선주 등 교역자들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결교와 관련된 인사들은 한 명도 서명자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3·1운동 참여로 인한 교회(당시, 복음전도관)나 지도자들의 피해도 장로교, 감리교에 비해서는 극히 미미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 참여한 성결교와 관련된 인사들은 지금까지 사료를 통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 김상준
정빈과 함께 1907년 5월 30일 한국성결교회를 개척한 김상준 목사는 1917년 성결교를 떠나 순회부흥목사로 전 조선 교회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김상준 목사가 성결교를 떠난 지 2년 뒤인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의 자주민’을 선언하는 거국적인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김상준 목사는 3·1운동이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자, 부흥전도의 일을 잠시 접어두고 밀양으로 갔다. 그 곳에서 경성성서학원 사감과 아현교회 주임교역자를 거친 밀양교회 주임 교역자인 강시영 전도사와 함께 용강에서 내려온 애국지사들과 3·1운동을 모의하고, 봉기할 때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2) 강시영
강시영 전도사는 1915년에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아현교회 주임과 성서학원 사감이 되었고, 김천 복음전도관의 주임교역자 직을 겸직하였다. 또한 1918년 밀양에 사역의 범위를 넓혀 개척한 결과 밀양 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주임이 되었다. 

강전도사는 밀양 복음전도관에서 사역하는 중에 3·1 운동을 맞이했는데, 김상준 목사와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평양 형무소에 압송되어 수감되었으나 킬보른(경성성서학원장)의 신원보증으로 출옥하였다.

3) 김응조
경성성서학원 대표로 참석한 신학생 김응조는 3월 1일 오전 8시 남대문을 지나 불란서 영사관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일제가 곧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고 체포령을 내리는 동시에 학교에 엄중한 감시를 하자, 경성성서학원이 부득불 방학을 결정함으로써 귀향하게 되었다. 김응조는 많은 선언서들을 비밀리에 휴대하여 가지고 영덕에 돌아와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고, 병곡지서에 구금당하였다. 다음날, 장날을 기해 수만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하는 중에 성이 난 일부 군중들이 군중 심리에 이끌려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이 일로 수백 명이 동시에 검거되고, 김응조는 사건의 주동자로 간주되어 투옥되었다.  4월 15일 투옥 후 5개월이 지난 9월 초순에 대구법정에서 김응조에게 4년이 구형되었으나,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주재소 구류로 증명되어 1년 6개월 형이 언도되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1920년 7월 15일에 출옥하였다.

4) 백신영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백신영은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경성성서학원을 7회로 졸업하였다. 개성교회에서 사역하다가 1918년 휴직 후 그녀는 모교인 정신여학교의 교사로 부름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애국지사들의 옥바라지와 가족들의 구휼(救恤)을 목적으로 1919년에 조직된 혈성애국부인회(血誠愛國婦人會)가 처음 조직되어 활약할 당시부터 깊게 관여하였다. 1919년 10월 19일 정신여학교 안에 살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 천미례(千美禮)의 2층 방에서 17명이 모여 대조선애국부인회(大朝鮮愛國婦人會)와 혈성애국부인회가 연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고, 결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1월 28일 동료인 교사 오현주의 배신으로 애국부인회가 검거당할 때 피검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1922년 출옥 후, 백신영은 성결교회로 다시 돌아와 남은 여생을 성결교 전국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복음전도에 주력하였다.

5) 한도숙
한도숙은 황현숙, 민원숙과 함께 1919년 3월 20일 천안 입장의 장날을 택해 독립만세를 거사하였다.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감옥에서 3주일 만에 판결을 받고 1년형이 내려 복역을 하다가 음력 섣달그믐께 모범수로 가출옥하였다. 

1년 옥중생활 중에 한도숙은 유관순을 만났고, 10명의 여성들과 함께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고초를 당했다. 감방 생활에서 기도하던 중, 그녀의 애국심은 불쌍한 영혼을 인도하는 신앙심으로 바뀌었고, 이때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출옥 후 그녀는 1920년 그녀의 모친의 모교이기도 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23년에 졸업하고 밀양에 거주하면서 블랙(Miss E. Black) 여선교사와 함께 영남 일대의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사역을 감당하였다. 

6) 김기삼
1941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여 목사가 된 김기삼은 오사카(大阪)의 이마사도(今里)교회 목사로 부임하며, 선교활동을 하는 중에 재일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1943년 2월 22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3년 4월 19일 재판에서 2년 집행유예와 5년의 언도를 받았다. 

이같은 김기삼의 민족운동참여는 경성성서학원 입학 전인 1919년 3·1운동 때에도 나타난다. 그는 3·1운동 만세사건에 가담하여 출판법,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부산 형무소에서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김기삼은 1918년 9월 박제원을 파송하여 설립된 동래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우리 민족의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고 사회문화적 선교를 실행하였다.

7) 이상철
『활천』 창간과 실무의 역할을 맡고, 1923년 경성성서학원 교수로도 봉직한 이상철 목사는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현풍, 고령의 장날을 택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 공채모집위원, 대구 달성군 교통사무지국장으로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는 1920년 8월 이두산과 함께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경고문, 일본물품 불매고지서, 납세거절 포고문, 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인정서, 독립청원서, 자유지(「自由誌」) 등을 입안, 작성하고 이를 등사하여 대구, 달성, 고령 일원에 유출했다. 

그리고 워싱턴 국제회의에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압제에서 벗어나도록 독립 지원을 위한 청원서를 미국인 부헤리, 카우만, 허인수 선교사에게 보냈다. 
 
2.  3·1운동 참여에 대한 평가
1) 한계
한국성결교회는 1921년에 와서 목회본위의 기성교단으로 경화되었기 때문에 복음전도 우선의 선교회 제도를 벗어나지 못한 전도관 체제로서 특별한 조직이나 행정체계가 없었고, 1907년부터 설립된 복음전도관 수효도 1919년까지 합쳐도 21개소에 그치는데 머물렀다. 한국성결교회의 민족운동에 대한 소극적 참여는 근본적으로 동양선교회의 정교분리 정책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이것은 동양선교회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사역하는 미국선교사들의 일반적인 특색이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정교분리 정책과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국성결교회는 1910년 토마스 감독의 한국입국을 통해 한국인 중심의 초기 복음전도관 시대에서 1921년까지 외국선교사 중심의 일인 감독체제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기성교단보다도 선교사들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조직된 행정체계를 갖춘 교단조직 아래의 교회가 아니라 선교중심의 복음전도관 체제였다. 당시 복음전도관은 영혼구원을 위한 직접 복음전도를 지향하고, 교육과 의료를 통한 간접복음전도를 지양하였다. 

따라서 3·1운동 때 동양선교회 선교사나 당시 조선의 책임을 맡고 있던 토마스 감독도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며, 교회의 비정치화 입장을 견지하였다. 

2) 긍정적 평가
3·1운동이 일어날 때 한국성결교회는 16인 대표나, 또한 교회적으로도 어떤 다른 뚜렷한 독립 행사를 갖지 못한 것은 독립 운동 후에 일제로부터 받을 수난으로부터의 회피나 애국심의 결여와 빈곤에서 결과된 것이라기보다는 오직 사중복음만 전하고자 하는 당시 동양선교회의 선교목적에 따라 구령 부흥운동에 오로지 진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결교회는 초기 한국교회사에서 민족구원이라는 민족교회적 기능 성취동기보다는 구원사적(救援史的)인 복음주의 입장에서 개인구원과 구원받은 자의 책임으로서의 성결이라는 성취동기로서의 모습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민경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족교회로서의 구조 동기가 비교적 약했다는 말은 비판적 문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성결교회가 성결교회로서 서있는 그 근거는 그 소명이기 때문이다. 이 시민적 민족의식 형식이 교파의 경건주의적 신앙의 순수성 타락으로까지 지목되었던 것은 한국의 경우 장로교였고, 역사적으로는 비교적 초기 감리교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한국성결교회 성도들도 부정할 수 없는 한민족의 피가 흐르는 한국인이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는 과정에서의 기독교인의 참여는 매우 광범위하고, 적극적이었다. 3·1운동 당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성결교회도 개별적인 참여를 하였다. 

| 닫는 글 |
지금까지 살펴본 바 김상준, 강시영, 김응조, 백신영, 한도숙, 김기삼, 이상철 등 한국성결교회와 직접 관련된 자들의 직접적인 3·1운동 참여로 인한 검속과 옥고, 항일운동 등은 한국성결교회가 민족운동에 대한 몰역사성을 가진 소극적 교단이라는 평가를 재고하게 해준다. 

이것은 지금까지 성결교회의 민족교회로서의 몰역사성 이라는 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성결교회에 대한 부정적 비판을 일소해주며, 균형 잡힌 역사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한국성결교회는 교회의 본래적 사명인 구원의 방주로서의 영혼구원 사명에 우선적으로 최선을 다해 주력해야 하나 민족과 한국사회에도 열려있는 교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것은 일제하의 3·1운동은 어느 한 입장에서 평가될 수 있는 하나의 사회 정치운동이 아니고, 이 나라 백성이면 누구나 다 참여하게 마련인 기독교 민족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운 목사
성결대 교수·본지 논설위원
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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