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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선교적 생활
부활과 선교적 생활
2019-04-11 오후 3:07:00    성결신문 기자   


사도행전은 ‘부활의 복음’ 이라고 불려 왔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복된 소식을 전파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설교에서 부활에만 국한되지 않았지만, 부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사도들의 설교는 사도행전 1:8에 나오는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너희가…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제자들은 유다의 후임을 정할 때도 가장 중요한 자격은 그 새 사도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행 1:22)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렇게 선교는 부활과 너무나 단단히 얽혀 있다.

1. 부활과 변화

(1) 부활 후 주님의 40일
예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그 40일 동안 무엇을 하셨을까? 성경은 부활의 주님이 승천하시기까지 여인과 제자, 그리고 믿는 형제들에게 모두 10번 나타나 보이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나타나 보이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부활을 믿게 하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시고 세계선교의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제자들은 40일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었다. 지금 이곳에, 살과 피로, 몸과 영혼으로 나타난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그 내용과 함의를 철저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 절실히 필요했다. 죽음 너머의 생명을 약속하는 부활만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부활을 알아야 했다. 

환각 상태는 40일간 지속될 수 없다. 꿈도 40일간 이어질 수 없다. 종교적 광란도 40일간 유지될 수 없다. 그 40일은 예수님의 부활은 가족과 이웃과 함께, 거리에서든 집에서든 살아내야 하는 생활로, 예수님의 제자인 그들이 살게 될 생활로 규정해 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일터에서든 정치 현장에서든 인간성 상실의 현장에서든, 신앙생활 가운데서든 부활로 살아내야 하는 생활이었다. 그 생활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을 통하여 어떤 삶을 담아내야 한다. 

(2) 바울과 제자들의 변화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행 9:1-18). 이 사건은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완전히 뒤바뀐 생의 전환점이었다.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H. Ridderbos)는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사의 중심사건이며 또한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 전체의 중심이다”라고 말했다. 옳은 지적이다. 

바울이 아덴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예수와 부활”을 너무 강하게 전해서, 어떤 아덴 사람들은 그가 예수라는 신과 아나스타시스(Anastasis: 부활을 뜻하는 헬라어)라는 두 신을 전파하고 있다고 혼돈했을 정도였다(행 17:18). 그런 혼란은 유감스럽지만 위대한 십자가 신학자인 바울도 부활의 메시지를 최고로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은 그의 삶과 사역의 출발점이자 원동력이었다. 만일 바울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울이 되었을까? 이는 바울 사도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택함 받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3년 동안이나 주님과 함께 지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도나 믿음과 헌신, 권세 등에서 형편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리다툼이나 하며 예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했다. 의심 많던 도마, 성질 급한 베드로 등 모든 제자들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절망에 빠졌던 이들이 영적 전사로 돌변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몸을 던졌으며 종국에는 대부분 순교했다.

2. 부활로 사는 선교적 생활

예수께서 규정한 부활의 삶은 우리에게 익숙한 삶과 완전히 다르다. 마치 죽음과 생명이 다른 것처럼, 부활의 길가에서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을 때는 관람객이었던 그래서 눈앞에 펼쳐진 시각적 웅장함의 다양한 면모를 고르고 선택해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었다. 

지루해지면 여행 책자를 뒤적이며 그 자리를 떠나 다음에 나오는 경치를 기대할 수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삶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엡 2:2)고 지적한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가 이미 익숙해 있는 모든 것에 모든 것을 덧붙이는 무엇이 아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것을 살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롬 8:22). 해산의 고통 없이 부활로 사는 일은, 본질적 특성상 잘해 내기가 쉽지 않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리고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도 우리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본다. 우리가 살아내는 부활이 얼마나 시행착오의 연속인지를 본다. 

(1) 부활과 닮아가는 생활
만일 이 세상이 끝이라면 매 순간마다 육신의 정욕대로 즐기며 사는 게 최고일 것이다. 바울 당시 에피큐로스 학파의 슬로건이 꼭 그랬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 그러나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기에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고(마 6:19-2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벧전 2:11) 살아간다. 

성경적인 거룩한 가치관(마 6:33; 골 3:1-2)과 그리스도를 닮은 고상한 인격(엡 4:15)이 우리의 영원한 자산이다. 우리는 그것으로 거룩한 신부로 준비되며, 장차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계 19:7-8).

(2) 부활과 새롭게 하는 생활
이 세상은 분명히 장차 없어진다. 우리의 본향은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이다(히 11:13, 16; 계 2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셨고 또 분부하셨다(막 1:15; 마 6:10; 눅 11:20, 17:20-21).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성도들을 통해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신다. 부활의 영은 생명을 살리는 영일 뿐 아니라 새 창조의 영이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일 뿐 아니라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요, 불의에 대한 의의 승리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부정과 불의로 황무해진 이 땅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사명이 부활의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책무이다(마 5:3-16; 대하 7:14).

(3) 부활과 승리하는 생활 
세상은 광야와 같이 고난과 슬픔이 가득한 곳이다. 사망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게다가 죄와 세속의 세력이 가하는 핍박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길은 가시밭 길이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함께 계신다. 그는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신 승리의 주님이시다(요 16:33). 고난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고 그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은 부활 신앙인에게 주어진 분명한 축복이다(롬 8:34-39; 고전 5:57).

(4) 부활과 끝나지 않은 과업에 헌신하는 생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처음 하신 말씀도, 승천하면서 마지막 주신 말씀도 선교 명령이었다(요 20:21; 마 28:18-20). 부활의 복음이 세상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 후에야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다(마 24:14). 

그날 이후 소망하던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하늘의 영원한 상이 주어지게 된다. 따라서 선교는 주님의 지상명령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축복이다(고전 15:58; 딤후 4:7-8). 초대교회 제자들은 이 사명을 위해 헌신하며 순교도 불사하였다. 그러나 땅 끝을 향한 선교가 교회의 핵심으로 등장한 것은 놀랍게도 오랜 세월이 흘러서 이루어졌다. 

1792년 월리암 캐리(William Carey)가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의 헌신을 위해 여러 수단들을 사용할 의무에 대한 연구”(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를 펴내면서 비로소 현대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선교는 더 이상 국경 너머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선교적 회중’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 어떤 교회도 스스로를 위해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세상에 염두를 두어야 한다. 복음 역시 어떤 특정 집단에 국한될 수 없다. 예수께서 모든 문화, 모든 인종, 모든 세대 모든 사회 집단의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끝나지 않은 과업에 헌신하는 생활은 선교사를 많이 배출하거나 선교행사를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선교를 여러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다루면서 그리스도인들 중 특정인들이 주도하고 참여하는 유형을 이루는 교회생활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제 선교와 선교적 생활은 여러 개 중의 하나로 전락하거나 없어져 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파도에서 모색된 것은 서구사회가 후기 현대사회로 인해 크게 세속화된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희망이 소멸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시작된 것이 선교적교회다. 이는 선교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본질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가 ‘선교적’을 ‘생각과 행동과 삶의 방식이 선교 지향적인 것’으로 요약하여 정의한 것 처럼 ‘선교적 생활’이라는 말은 어떤 곳에 소속이나 어떤 행위가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선교와 연결하여 바라보고 적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특정한 사람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보내는 자가 아니고, 보냄을 받은 자로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선교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보내진 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생활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삶에서 선교에 참여한 사람이 되어 예배하고 간증으로 가득한 교회를 세워가게 된다. 그곳에 수동적인 그리스도인도 없고, 교회의 쇠퇴도 없다. 

구성모 교수 [성결대학교]
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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