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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교회의 역사적 배경
2. 19세기 북미성결운동
2020-09-28 오후 7:57:00    성결신문 기자   


2. 19세기 북미성결운동
 1) 19세기 성결부흥운동 -③
파머의 성결운동은 이후 19세기 후반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중심이 된 ‘기독교인의 성결촉진 고양을 위한 전국천막집회 연합회(The National Camp Meeting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로 계승되었다. 

한국성결교회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이 단체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감리교 목사 우드에 의해 시작되었다. 1860년에 베스트셀러 좥완전한 사랑좦(Perfection Love)을 쓴 우드(J. A. Wood)는 장로교 신자로서 웨슬리의 성결론에 매력을 느껴 감리교 목사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감리교에서 성결의 복음이 점차 약화 되어가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감리교의 부흥에 큰 영향을 주었던 ‘천막집회’를 재개하여 쇠퇴해가는 성결의 메시지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천막집회는 19세기 초 제임스 맥그리디(James McGready)로부터 시작되어 침례교와 감리교에 의해 약 1840년대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당시 천막집회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회개시키며 침례교와 감리교가 서부 변경지역과 남부에서 지배적인 교단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 측 교회의 감독들은 감리교의 여러 신앙적 전통 중 천막집회의 상실에 대하여 깊이 통탄하며 성화에 대한 재강조를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천막집회로 상징되는 부흥운동의 회복만이 시대를 치유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던 대다수의 보수적인 감리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드 또한 성결운동의 회복을 위해 다시금 천막집회를 개최해야 할 것을 확신하였다. 그를 통해 성결을 체험했던 드레이크 부인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여 자신의 집을 개방하는 한편 성결운동이 시작된다면 천막집회를 위한 비용의 절반을 부담할 것을 자진해서 약속하였다.

우드는 이 아이디어를 뉴저지 감리교 위원회의 오스본(William B. Osborn) 목사와 나누었다. 그리고 오스본 목사는 이에 열성적으로 동참하여 1867년 이 문제를 인스킵(John Inskip) 목사에게 제기하기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인스킵을 만난 오스본 목사는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결천막집회를 개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스본의 제안은 인스킵의 동의를 얻어냈고, 그들은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성결운동의 제안자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천막집회 장소를 뉴저지의 바인랜드(Vineland)로 결정했고, 일시는 1867년 7월 17일 수요일에서 7월 19일 금요일까지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위원회는 그들 스스로 ‘기독교인의 성결촉진 고양을 위한 전국 천막집회 연합회’라 이름하였고 회장으로 인스킵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 연합회는 19세기 후반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 운동의 성공을 위해, 연합회의 창시자들은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집회에서 성결 이외에는 어떤 메시지도 제시되지 않도록 하였다. 무디의 부흥운동이 불신자 대중들을 상대로 한 전도운동이라면, 이 집회는 기존 신자들을 상대로 한 은혜운동이었다. 

1867년 7월 17일 바인랜드(Vineland) 천막집회를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남부 뉴저지(New Jersey)의 소나무가 있는 평범한 곳에 놓인 찰스 랜디스(Charles Landies) 마을에 몰려들었고, 10일의 집회기간 동안 그들은 기독교의 성결의 주제에 대한 설교와 권고를 조직위원회의 위원들과 심프슨(Mattew Simpson) 감독에 의해서 듣게 되었다. 

이처럼 1867년 바인랜드에서 일어난 연합회의 결성은 19세기 미국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간주되었다. 다음해 펜실베니아의 만하임(Manheim)에서 열린 2차 ‘전국천막집회’는 300명 이상의 교역자와 2만 5천여명 이상의 신자들이 참여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성결집회가 계속 발전해나가자 회장이었던 인스킵 목사는 개교회의 목회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가 성결집회를 이끄는 부흥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1871년 한해에만 600여회의 집회가 열렸고 약 1,200명의 회심자와 3,700명의 성결 체험자를 얻을 수 있었다. 집회는 여러 도시에서도 개최되었고, 1867년부터 1883년까지 총 52번의 집회가 열렸다. 

이후에도 성결운동은 확산을 거듭하여 1887년까지 전국적으로 67개의 성결집회를 위한 캠프장소가 마련되었고, 11개의 천막집회장소가 생겨났다. 1888년에는 전국적 규모의 연합회가 3개, 미국 전역에 걸친 지역 연합회가 26개, 캐나다에 2개가 형성되었다. 1887년에 전국성결연합회에 등록한 206명의 부흥사는 1891년에는 304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19세기 후반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수많은 새로운 성결 교파들을 형성하였으며, 한국성결교회 또한 19세기 말에 일어난 성결운동의 영향권 아래에서 형성된 교단이라 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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