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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교회 100년사(11)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적 배경
2020-12-28 오전 11:17:00    성결신문 기자   


3. 동양선교회(OMS)의 태동과 발전

1907년 조선 땅 한복판인 경성에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걸고 순복음(純福音)이라 불리운 사중복음을 전함으로써 이 땅에 한국성결교회가 창립되었다. 자생적 개척으로 시작된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 약칭 OMS)가 동양선교를 위해 설립한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정빈과 김상준 두 전도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따라서 초기 한국성결교회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1) 1900년 전후 일본교회의 상황
개신교보다 일찍 천주교는 사비에르(Frencis Xavier, 1506-1552)에 의해 1549년 일본에 상륙하였고, 1612년 현지 통치자들(native rulers)에 의해 박해를 받을 때에는 상당한 지역에 걸쳐서 포교에 성공한 결과를 갖게 되었다. 개신교가 일본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미·일 조약이 맺어진 1858년부터 비롯된다. 사와 마사히코(澤正彦)은 이에 좥일본기독교사좦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54년에 일본은 250년간의 쇄국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미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58년에는 해리스(Harris)가 방문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는, “일본에 있는 미국인 스스로가 그 나라의 종교를 믿고, 예배당(교회)을 거류지에 건립해도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인에게는 기독교가 종래와 같이 금지되어 있으나나가사키에서의 후미에(踏)는 앞으로 폐지한다고 통고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개국과 함께 일본에서의 기독교 예배의 길이 처음으로 열렸다.”

따라서 일본에서의 개신교 출발점은 일본이 250년간 쇄국정책을 풀고 개화정책을 밟은 1850년대 에도 말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기독교금지정책을 그대로 인계하고 있던 메이지 정부는 구미열강의 압력에 의하여 1873년 기리시단(切支丹: 천주교) 금제고찰(禁制高)을 철폐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의 금지령 해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는 법령이 아니었다. 정부의 기본철학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화혼양재 (和魂洋才)라 할 수 있다. 화혼양재의 ‘혼’은 화하고, 재는 양이다. 즉 정신(魂)은 일본 전통의 천황제, 또는 동양도덕을 가지고, 기술(才)은 서양에서 구하여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이중의 모순된 철학의 혼합이었다.

한편 메이지 정부의 서양인에 관한 관심은 서양 세계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정신(기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인 서양의 정치제도나 물질적 번영에 있었다. 기독교는 조약 개정과 선진 자본주의 제국에의 대항으로 취하게 된 서구화 정책과 문명개화의 물결을 타고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헌법 및 교육칙어 발포에 의하여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완성에서 발생한 격렬한 기독교 배격에 의하여 교회는 극도의 침체를 계속하였다.

일본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전도를 시작한 것은 1859년(安定 6년)이었으나, 최초의 개신교회가 세워진 것은 그때로부터 13년 뒤인 1872년으로 기독교 금지령이 철폐되기 한 해 전 일이었다. 이 교회는 요코하마 예수공회(耶蘇公會)로 불려졌다. 그러나 일본의 개신교는 1890년을 전후로 해서 점차 교파교회가 되면서 그 형태가 정비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로 미국이나 영국의 선교회와 관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태가 되는 교회의 교파적 성격을 답습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교회가 교파적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하여도,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가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맞부딪치고 있었고, 신교의 자유, 종교분리가 확립되지 않는 불안정한 때였다. 사와 마사히코는 일본 개신교가 메이지유신 이래 비교적 순조롭게 성장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은 1889년을 경계로 교세가 확장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인이 법적 근거를 가지고 공인되었다는 해석은 1889년 헌법에 있는 신교,(信敎) 유였지만 이것마저 교육칙어(敎育勅語)와의 관련 때문에 기독교인은 묵인이나 공인과 함께 천황제 추종을 대전제로 해서만이 그 존재가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서 초기 선교사들은 보수적인 순복음신앙의 소유자들로 부흥운동의 주자들이었다. 따라서 1887년까지의 기독교 전파의 역사는 부흥운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자유주의 신신학(新神學)이 들어와 조합기독교회의 목사들인 아베(安磯雄), 요코이(橫井小植), 가네모리(金森通論)가 신앙을 버리고 정치계로 빠진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일반교회에서는 성서신앙을 중요시 않게 되는 경향이 눈에 띄게 일어났다. 1895년 10월 일본 조합교회는 나라대회(奈良大會)를 개최하여 대회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문에는 신신학에 의한 자유주의 입장을 갖는 사람들도 포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홍고유미죠(本鄕町)교회의 에비나(海老名正)와 후지미쵸(富王見町)교회의 우에무라(植村正) 사이에 신신학 인정의 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 등으로 인해 1900년경 기독교의 발전은 답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와 겨우 교세를 회복하여, 1901년 긴자(銀座), 교바시(京橋)의 여러 교회에서 일어나서 요꼬하마(橫濱), 오오사까(大阪), 교오또오(京都)로 급속히 확대된 부흥의 분위기로 20세기 대거 전도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대표집필 정상운 목사
(성결대 교수/본지 논설위원)
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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