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2 (월요일)
총회/기관 지방회 화제&인물 특집 선교&신앙 목회&교육 열린광장 오피니언 교계&문화  
전체보기
특집
기획
성결교회100년사
다문화
 
 
뉴스 홈 특집 특집 기사목록
 
부활신앙과 영성
교회는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들
2021-03-29 오후 1:42:00    성결신문 기자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빈 무덤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눅 24:31). 그리고 ‘빈무덤 보고’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이방인들에게까지 역사적 사건으로 확증된 것이다. 

성령강림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복음의 사건이고, 예수님을 만나는 종교체험의 사건이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자신들에게 직접 임하는 것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소 예수의 부활을 더욱 확신하게 되고, 예수의 부활을 전파할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자기 이성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믿을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 곧 성령에 의해서 오늘날도 예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서로 모여 떡을 떼면서 재산을 공유하며 부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성령에 의한 원시 부활신앙 공동체가 오늘의 교회다.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특징된다. 부활신앙 공동체는 

첫째로 예수를 살아 계신 주, 즉 부활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전하였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처음 기독교 부활신앙 공동체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를 ‘주’로 부른 것은, 예수는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막 1:1). 즉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다(요 1:14). 그리고 그들은 ‘예수가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죽으셨다. 그러나 지금은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니 곧 다시금 나타나실 것이라’고 믿었다. 

부활에 의한 영성회복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하나님께 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자신의 형상을 이루어 가시는 그리스도께 있다. 부활에 의한 영성 회복이 바로 관심사이다. 안식의 일차적 관심은 우리가 무엇을 할까 혹은 하지 말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성하시고 쉬시고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저 하나님에 관한 추상적 이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생생한 임재로 경험되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 부활에 기초한 영성 형성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삶 사이에 이런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살아 있는 자들의 땅은 분명 낙원 같은 휴양지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터에 가깝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녀들과 더불어 자리를 잡은 곳은 바로 이런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을 앞지르는 삶을 선포하고, 모든 삶의 유기적 연관성과 그 소중함을 증거하며, 부활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

복음서에는 자주 예수님이 식사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분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말씀하시고, 일하시고, 사람들을 영접하실 때 사용했던 곳이자, 또한 복음서 기자들이 즐겨 선택했던 배경이 바로 식사 자리다. 

이런 이유로 부활에 의해 영성 형성과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주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설명해주고 또 거기에 참여토록 해주는 이 두 번의 식사, 곧 엠마오 글로바 집에서의 저녁 식사와 갈릴리 해변에서의 아침 식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영성 형성을 위한 기독교 훈련이 일상의 삶과 분리된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일상적인 일은 없다. 오늘날 교회 문화에서 가장 많이 제공되는 메뉴에 속하는 추상적인 원리들은 그 출발부터 성경의 계시와 어긋나는 것이 많다. 우리가 참석하는 성경공부 또한 중요하다. 

캠프나 제자훈련도 중요하다. 하지만 일생을 두고 본다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소리 없이 함께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만큼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엠마오 사건보다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일곱 제자들은 아마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활하신 그날과 팔 일째 되는 날이다. 사실 도마는 예수님을 만지기까지 했다(요 20:19-28). 여기서 그 이유를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부활과 식사

부활에 참여하는 일은 강제나 기술적 조작으로 되지 않는다. 여기엔 그저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차원, 그리고 그 선물 속으로의 참여라는 차원이 존재한다. 이 두 사건 어디에서도 부활은 제자들을 압도하지 않는다. 억지로 부활의 인식과 고백을 끌어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무기삼아 제자들에게 자기를 예배하고 충성을 바치라고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교회 일각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려는 변증적 목적을 위해 예수의 부활을 이용하는 전통이 있었다. 의도는 훌륭하지만 빗나간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부활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몇 시간이나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사태의 진상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이 믿게 된 것은 부활을 받아들이고 부활에 참여하고 간여하면서였다. 식사는 바로 이런 체험을 위한 이상적인 정황을 마련해주었다. 성경에서 종종 식사가 하나님이 인간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체험하는 배경이 된다. 식사를 하면서 사람들은 복잡한 희생의 세계에 개입하게 된다. 

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먹여 살린다. 우리는 결코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생명을 먹고 살며, 이 생명은 밖에서 주어진다. 오늘날 삶에서 식사는 그 중요성이 매우 축소되어 있다. 물론 여전히 먹으면서 살고 있지만, 식사의 세계는 해체되어버렸다. 

패스 트푸드점들이 놀랄 만한 속도로 증가하는 현상은 대화를 나눌 만한 여유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식탁 주변에 자리한 텔레비전 역시 친밀한 관계와 대화를 없애버린 요소다.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식은 주의 만찬이다. 이 의식은 기독교가 태동할 때부터 예배의 중심을 차지해왔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 세계에서는 모든 식사를 일종의 작은 성례로 간주하는 강한 전통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이런 전통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러 함께 음식을 나누었던 성경적 근거에 든든한 뿌리를 두고 있다. 각기 다른 네 번의 경우에 예수님이 식사 때 보이신 행동이 모두 네 개의 동사들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 사용된 네 개의 동사는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셨을 때다(마 14:13-21). 두 번째는 사천 명의 배고픈 군중을 먹이신 사건이다(마 15:32-39). 세 번째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목요일, 곧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저녁이다(마 26:26-29). 누가가 기록한 엠마오의 식사도 그중 하나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눅 24:30).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을 가지신다. 우리의 떡, 우리의 물고기, 우리의 포도주, 우리의 염소, 우리의 양, 우리의 죄, 우리의 좋은 점들, 우리의 일, 우리의 여가, 우리의 강점, 우리의 약점, 우리의 배고픔, 우리의 목마름 등 우리가 가지고 가는 모든 것을 받으신다. 예수님은 그것을 취하신다. 

우리 자신을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가는 것과 함께 우리를 축복하시며 감사를 드리신다. 그분은 성령으로 그것을 아버지께 가져간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간 것을 떼신다. 

식탁에서는 나만의 세계에 머물거나 자기충족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는 십자가 안으로 이끌려 간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나누며 이 십자가를 몸으로 표현한다. 거짓과 위선으로 단단해진 속과 딱딱하게 굳은 껍질로 나가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산산이 부숨으로써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부활과 영성의 실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처음으로 이런 깨어짐을 경험한다. 그분은 깨어졌으며 그 피는 쏟아져 흘렀다. 그 다음 예수님을 우리가 가져간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을 다시 나눠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가져간 그대로가 아니다. 자신, 곧 우리가 가져간 자아는 자비로운 주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다. 우리는 성찬의 식탁 앞에서 부활의 실천을 시작하지만, 거기가 끝은 아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식사에서 동일한 부활의 실천을 계속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식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인으로 임하시는 성만찬에 그 근거를 두며, 이 성찬을 매일 먹고 마심으로 그 부활의 의미를 확장해간다. 우리가 음식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아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의 모든 요소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삶 중에서 가장 평범한 행동이 가장 심오한 변화의 장이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우리가 성찬의 형식을 통해 증거하고 참여하는 자연과 초자연의 결합은 바로 식탁에서도 계속되고 계속 될 것이다.
부활신앙의 중심은 우리 생각의 중심에 재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근자에 횡행하는 심리주의, 도피주의 혹은 전문가 의존주의처럼 우리 영혼의 목마른 사슴이 마셔야 할 시냇물을 오염시키는 흐름에 대항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그 시냇물이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와 함께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흥미롭다. 무엇이 그들로 이런 실수를 하게 했을까? 부활은 직접 개입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직접적이며 관계적인 방식 말고는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기서 초연한 지성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된다. 황홀한 체험이나 환상 같은 것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통달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부활에 근거한 영성 형성은 친밀하며 인격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다. 창조가 단순히 아담이라는 흙덩이에 추가된 무엇이 아닌 것처럼, 부활은 인간의 삶 위에 덧붙여진 무엇이 아니다. 부활은 삶 그 자체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시고, 또 예수께서 불어 넣으시기 원하는, 우리의 현 존재, 그리고 거룩한 숨결인 성령에 의해 조성되는 우리 존재의 시작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시고, 알려지시며, 또 우리로 하여금 그 부활 속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쉽게 무시되는 교차점이 있다. 부활의 삶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살아서 지금 여기 계신다. 부활을 실천한다는 것은 이것을 알아채고, 그 속에 들어가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은 가정과 일터의 일상적 삶 속에서 실천되는 영성이다. 

구성모 교수 [성결대학교 / 본지 편집위원]
기자 : 성결신문
관련기사
 
 

 
네티즌 의견
전체 0   아이디 작성일
 
의견쓰기
 
다음기사글이 없습니다.
제32회 목회자 평생교육 지상강의
특집 기사목록 보기
 
  특집 주요기사
은현교회, 선교사 게스트하우스 ..
‘한국교회의 위기의 실상은 어..
‘한국교회의 위기의 실상은 어..
폐암4기 -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
1.평생교육원 지상강의-회복과 ..
2.평생교육원 지상강의-회복과 ..
3.평생교육원 지상강의-회복과 ..
고난의 현장 - 목신교회
 
 
가장 많이 본 뉴스
  사 설
회사소개 광고안내 이용약관 개인보호취급방침 이메일수집거부


[110-091]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29ㅣ대표전화 : 02-732-1286ㅣ 팩스 : 02-732-1285 ㅣ등록번호: 문화 다 06518
발행인: 김윤석 ㅣ사장: 박정식 | 편집인: 이강춘
Copyright ⓒ 2009 SKNEWS. All rights reserved. Contact: news@sknew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