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의 계절이다. 금년 가을은 유례없는 9월 폭염이라 할 늦더위 때문에 단풍도 늦게 왔다고 하는데, 아름답고 화려한 단풍은 늦게 왔어도 상관없다.
늦게 온 것처럼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 온 산이 통째로 살아서 가쁜 숨을 몰아쉬듯 붉고 노란색으로 물들 것이고, 사람들은 물든 단풍산으로 나가 함께 물든다.
어느 시인은 단풍을 “죽어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나태주, 단풍)이라 했지만, 나는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나무들이 만드는 치열한 몸부림이라 여기며 바라본다.
이때가 되면 꼭 되뇌이는 시가 있다. 미당의 추일미음(秋日微吟)이다. ‘가을날에 나직이 읊조린다.’는 뜻을 가진 추일미음의 일연에는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 맨드라미 접시꽃은 붉은 물이 들었지만 / 나는, 이 가을날 어떤 물이 들었는고” 라 했다. 시인 서정주는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가을날 한복판에서 자신을 보며 묻고 있다.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어가고 있을까?’
나이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가을날 같다고 우울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나이 숫자가 하나씩 더해지는 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생각은 깊어지고, 입술의 언어는 절제되고, 행동거지는 신중하게 되니, 이는 세월이 주는 은총 일 게다. 그러한 세월의 흔적들은 그 사람의 얼굴을 물들이며 나타난다.
40 이전의 얼굴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얼굴이며, 40살 이후의 얼굴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란 말도 이런 연유에서 나왔을 것 같다. 삶의 흔적들은 그 얼굴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물드는 것이라 한 것 아닐까?
물드는 계절을 수십 번 맞고 있는데 올가을 물드는 계절은 또 다른 무게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 가득한 넉넉한 얼굴이 내 얼굴에 하나씩 옮겨져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금년 나는, 어떤 물이 들어가고 있을까? 하고 물들기 시작하는 관악산을 바라본다.
관악산 단풍은 아직 어린아이지만 다음 주 즈음에는 이름답고 화려하게 단장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물드는 것이다.
淸水 ehc3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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