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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김응조 목사의 삶과 한국성결교회에 끼친 영향
영암 김응조 목사의 삶과 한국성결교회에 끼친 영향
2019-04-25 오후 1:39:00    성결신문 기자   


한국성결교회의 중심의 축을 이루는 영암 김응조 목사는 이명직 목사와 더불어 한 세기 한국성결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적인 지주이자 사부였다. 그는 성결교의 상징일 뿐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에서도 철저한 보수주의 신학자로서 한 획을 긋는 한국 기독교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았다. 

올해로 영암 김응조 목사 소천 28주기를 맞이하여 예성교단과 성결대학교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큰 족적을 남긴 김응조 목사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암의 삶이 한국성결교회와 더 나아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김응조 목사의 다양한 사역과 관련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영암은 성서신학자로서 한국성결교회가 성서적 복음주의 전통을 견지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끼쳤다. 

김응조 목사는 복음주의라는 용어보다도 ‘정통 보수주의’ 또는 ‘성서적 정통주의’ 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혹자가 비평하듯 이것은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국제기독교교회협의회)와 관련된 개혁주의적 칼빈주의로의 변질된 것이 아니라, 성결교회가 초기부터 강조해온 사중복음(온전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성서를 그대로 믿고, 성서 그대로 살라는 것이 곧 복음주의' 라는 이명직 목사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김응조 목사는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서에 입각한 재림 사상과 사중복음 전파에 역점을 둔 성서적 복음주의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초기 한국성결교회 설립자들이나 개척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 입장에서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인본주의적 자유주의신학을 배격하며, 보수신앙을 수호하는 신앙과 관련된 성서신학을 치중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둘째,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서 기독교 민족운동에 방향을 제시하였다.

한국성결교회가 내세 지향적인 개인 영혼구원의 역할에 끝나지 않고, 민족에 대한 사회구원 문제에도 열려있는 한국성결교회의 기독교 민족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열어 놓았다. 한국성결교회의 모체는 동양선교회로서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교리적 강조점을 그대로 수용하여 개인 영혼구원의 직접 복음전도를 지향하는 선교 지향의 교단으로 발전되었다. 

김응조 목사는 1910년 일제강점으로 나라가 송두리째 일본에 빼앗기고 국권을 상실하여 식민지 통치아래 놓여있을 때, 고종의 인산일을 이틀 앞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2년간 옥고를 치루는 고난을 겪었고, 이 일로 인해 1977년 12월 13일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표창을 받게 되었다. 

셋째, 일제 강점기 신앙절개 운동가로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조선신궁이 기공되면서부터 신사참배 문제가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양상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일본제국주의 정체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서 한국교회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에 반대해 오던 장로교도 1938년 9월 9일에 평양에서 개최된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문을 채택하고 신사에 참배하였다. 

김응조 목사는 신사참배를 국가의례로 주장하는 교단 지도부의 신사참배 무죄론에 대항하여 위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홀로 외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1938년 5월 4일로 성결교단과 교회를 떠났다. 다음은 영암의 결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로 『활천』 제16권 6호(1938년 5월)에 기록된 김응조목사의 사직 내용이다.

金應祚牧師 辭職
金應祚牧師는 五月 四日 附로 辭職하였고 今後 自由 傳道의 길에 나서게 된다는데 主의 祝福이 함께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1991년 장신대 한숭홍교수가 주장한 것과 같이 신사참배를 했다면, 영암은 성결교단을 떠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필자는 1991년 『목회와 신학』 9월호에 김응조 목사의 신사참배 친일행위를 제기한 한교수에 대해 이 문제로 지상 논쟁을 7년간 하였다. 급기야는 1997년국가보훈처가 개입하여 김응조 목사의 친일 의혹을 양자의 논문을 바탕으로 면밀히 조사하여 공식적인 최종 결론을 내린 바 승소하였고 그 결과가 국민일보에 게재된 바 있다.) 

피로써 신사참배를 거부한 철원성결교회 박봉진 목사,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3번 투옥되며 옥중에서 고문하는 자에게 불호령을 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킨 천세광 목사와 함께 김응조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도 일제의 신사참배 망령에 항거한 신앙절개운동으로 모든 성결인들이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복음전도자로서 한국성결교회가 선교 우선주의의 본연적 교단 특성을 견지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영암은 1917년 경성성서학원 재학 중 일본 전도여행에 참여하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교단을 잠시 떠났을 때도 「생명지광(生命之光)」을 3천만 민족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3천부를 발행하여 문서선교를 하였다. 

그는 사중복음 중에 재림의 복음을 선교와 연결시켜 복음전도를 강조하였다. 실제로 복음전도를 위한 개척교회 설립시에 자신의 개인 재산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교단 개척교회 선교기금처럼 제자들이 요청하는 대로 무상으로 지원하였다.

다섯째, 40권이 넘는 방대한 책을 집필한 저술가로서 신학교육과 문서선교에 큰 일익을 끼쳤는데, 그 영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증대되고 있다. 

김응조 목사는 1937년부터 1988년까지 단행본 43권(또는 42권, 『四重福音(敎理)』을 포함할 때 43권)을 집필하므로 한국성결교회 신학과 신앙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성경을 복음주의적 정통 기독교 입장에서 바르게 해석한 주해서가 필요함을 인식하여 『신약성서 대강해』를 1962년에 탈고하였는데, 『신구약 성서 대강해』는 당시의 목회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성경, 찬송가 다음으로 많이 구입하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 후에 김응조 목사는 이 6권의 책을 증보, 수정하여 12권으로 내놓았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제 학설과 하나님의 말씀이 혼잡하게 되는 것을 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여섯째, 교육가로서 전인적인 하나님의 사람을 육성하는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도약하는 오늘의 성결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예성교단 목회자 양성과 인류사회와 지역사회, 국가에 이바지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전인적인 하나님의 사람 양성' 을 대학 설립이념으로 삼고 1962년 9월 20일 성결교 신학교를 자신의 사저에서 시작하였다. 하나님 사랑, 국가 사랑, 이웃사랑을 3대 교육지표로 삼은 성결교신학교는 홍대실 권사의 헌신에 힘입어서 오늘에 와서는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우뚝 도약하고 있는 종합대학교인 성결대학교로 발전되었다.

일곱째, 탁월한 교단 지도자로서 성결교회 발전에 무엇보다도 예성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암 김응조 목사는 예성과 기성교단 분립 전에도 교단 총회장과 신학교 교수로, 그리고 분립 후에는 예성교단 중심지도자로 활동하며, 오늘날 예수교대한성결교회가 일천 교회가 넘는 교단으로 발전하기 까지 이르는 데에 산파역할과 중심축 역할을 감당하였다.

1961년 4월 11일 16회 총회는 15회 총회에서 NCC(NCCK, KNCC로서 National Council of Church in Korea,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복음주의협의회) 두 기관에 대한 동시 탈퇴안이 보류되어 이월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오히려 양 기관에 더 많은 대표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자 양 기관 탈퇴를 주장하던 김응조 목사는 이명직, 이성봉, 황성택 목사와 함께 ‘복음진리동지회(이후, 보수동지회)’를 조직하고 NCC 및 NAE 두 기관에서 단연히 탈퇴하여 성결교회 정통성을 수호하고 정체성을 확립하여 성결교회 본연의 순복음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천명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발족시켰다. 예성과 기성 교단 분립에 대해 김응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의 일부 교단에서 신앙 노선의 관계로 일어나는 분규와 분열의 바람은 우리 교단에도 불어왔다. 3년간 이 문제를 가지고 싸워 오다가 1961년 4월 총회 에서 정식적으로 분립되어 기성, 예성이라는 간판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는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음을 알게 되면 문제는 간단하다. 나는 현대 정치에는 흥미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 회합에는 별로 참여하지 않고 내가 맡은 일에만 충성할 뿐이다.

여덟째, 능력있는 부흥사와 목회자로도 한국성결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응조 목사는 1920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뒤, 철원교회를 파송받은 것을 기점으로 1938년 독립문교회를 맡을 때까지 여러 교회에 파송받아 목회를 하였다. 30세에 목사가 된 김응조 목사는 그 해 10월 광활한 미개척지인 북선지방 감리목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북도, 북부 강원도 일부, 북간도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다. 당시, 성결교회 5개 지방회 가운데 하나인 북선 지방은 북청 군내 5개처 교회와 함흥, 회령, 북간도 용정, 강원도 강릉 등 10개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김응조 목사의 부임 후 5년 동안의 결과는 30교회가 증가되어 40교회가 되는 등, 북선 지방의 교세 신장은 놀라운 부흥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성결교뿐만 아니라 초교파 부흥사로 활약을 하였다. 1926년부터 1968년까지 순회부흥집회 횟수는 480회(성결교 290회, 장로교 136회, 감리교 54회)로 나타난다.

닫는 말
영암 김응조 목사 그는 격동과 전환의 20세기 한국사와 운명을 같이하며, 한평생 이 땅에 복음만을 외치고 오로지 그 일만을 위하여 살다간 성결교회가 낳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한국교회가 낳은 모세였다. 그는 1907년 이래 지금까지 성결교회의 시대의 장을 사중복음의 기초 위에 열어간 성결의 기수로서, 주경신학자와 부흥 설교가, 또한 복음전도자와 교육가, 독립운동가, 신사참배 항거자, 저술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창립자 정빈, 김상준 목사와 더불어 성결교 창립 한 세기를 넘어서 가장 영향력있는 한국성결교회의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모든 성결인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이 글은 2019년 4월 16일 성결대 야립국제회의실에서 개최한 영암 김응조 목사 소천 28주기 기념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 중의 일부분으로 각주를 생략함.)

정상운 목사
성결대 신학부 교수 / 본지 논설위원
기자 : 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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