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6·25 한국전쟁’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을 통한 ‘6·15 남북성명서’가 채택되고 2018년 4월 27일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현 시점에서도 중요한 까닭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충격이 아직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북한 7천만이 넘는 동포들의 삶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으며,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 6·25 한국전쟁 발발과 납북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되고,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밀려가다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해 9월 28일 수도 서울이 탈환되었다. 서울수복이 되기까지 3개월간 남한 내 서울에서 성결교회는 큰 수난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지도자급인 성결교 수뇌부 인사들이 강제 납북된 사건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북한교회의 압박과 피해는 해방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6·25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서 이미 모든 교회가 폐쇄, 접수되고 공산주의자로 전환하거나, 협조하지 않은 모든 성직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행방불명이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북한교회의 잔혹한 시련은 6·25전쟁과 함께 남한교회에 연장선으로 나타났고, 남한교회의 피해는 교회 지도력 상실에서 크게 나타났다.
2. 성결교회의 피해와 재건
① 성결교회의 피해
6. 25 한국전쟁으로 인한 인명손실은 남한에서만 사망 및 실종이 962,000명(군인 210,707명, 민간인 704,263명)이었고, 전쟁 초기 곧 제 1차 남하 때 이미 광공업을 비롯한 주요 산업시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남한교회의 저명한 교역자들과 신학자들이 북한으로 납북되어 순교하거나, 납치당한 교역자의 수는 민경배 교수에 의하면,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성공회 6명 등 238여명에 이르렀다.
성결교회는 납북자로 박현명, 박형규, 이건, 김유연, 유세근, 최석모 목사 6명과 6·25 동란 전후에 체포되어 행방불명된 자로 박태주, 함석진, 서두성, 김상운, 김성달, 오계식, 정운학 목사와 최애주, 김영태 전도사 9명 등 총 15명을 들고 있다. 또한 파손, 손실된 교회의 수는 남한에서만 장로교 541교회, 감리교 239교회, 구세군 4영문이었는데, 성결교는 106교회로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또한, 6·25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순교당한 성결교 교인들은 교역자들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사료에 의해 숫자로 나타난바 총 154명 이상에 달한다.
② 성결교회 재건
전쟁의 위기 속에서 교회는 신앙부흥의 일환으로 교회재건과 전도활동에 나섰다. 인명의 손실과 교회당이 파괴되고, 기독교 기관이 폭격과 화재로 소실되는 등 그 피해의 정도는 대단히 컸다. 1951년 9월 8일 동양선교회는 주한 선교부를 재발족하여 부산으로 피란 간 교역자들과 피란총회, 피란신학교를 돕는 재정적 도움을 주며, 선교사 4명을 파송하는 등 한국성결교회와의 관계를 재개하며, 아낌없는 원조를 하였다. 한국성결교회는 전쟁 발발 후 1952년에 이어 1953년에 동양선교회에로부터 재정적 큰 후원을 받았다.
한국성결교회는 한국전쟁 3년 기간 동안 힘든 피란생활 가운데서도 전도와 신개척에 힘쓰다가 1954년 4월 환도총회를 계기로 교단재흥에 총력을 기울였다. WRC(세계구호위원회)와 WCS(기독교세계봉사회)가 도왔고, UN군 부대도 건축자재를 지원하였고, 환도 후 IBRD자금도 도움을 주어 충무로교회를 비롯하여 130여 교회를 재건하였다. 월드비전(선명회)도 동양선교회를 통해 성결교회 재건에 참여하여 자선과 구호사업을 통한 선교활동에 큰 기여를 했다. 교회재건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중에 신개척 교회도 크게 증가하였다.
1956년 8월까지 새로 설립된 교회 수가 250교회에 달하였다. 1955년 교단 교세통계표를 보면, 교회 수는 353개소, 1956년에는 383교회로 나타난다.
3. 성결교회에 미친 영향과 제언
1) 성결교회에 미친 영향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의 조인과 함께 20세기 한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그리고 20세기 세계사의 한 중요한 전환기적 사건이었던 6.25 한국전쟁이 멈추었다. 그러나 어떤 변형 어떤 발전으로 각색되면서도 그것의 원상은 현대 한국사의 자장(磁場)을 이루며 많은 역사의 부분들이 그것에 흡인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전쟁과 그 여파는 사회 질서와 규범, 퍼스낼리티를 변형시키거나 손상시켰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작용하고 있다.
첫째, 6·25 한국전쟁은 남과 북에 산재한 성결교회를 남한 중심의 성결교회로 이동하여 편중화 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전쟁기간 동안 대략 130여만 명이 북에서 남으로 월남하였는데, 북한 지역의 성결교 교역자들도 대부분 이 기간 동안 남으로 이동함으로 지역적으로 남한 중심의 성결교회로 발전하는 남한 편중화라는 불균형을 가지게 하였다.
둘째, 6·25 한국전쟁은 동란 초기에 총회와 신학교 핵심 교역자들의 납북으로 인해 지도력의 공백을 보였고, 이것은 신사참배 문제로 자숙하던 이명직 목사를 다시 성결교회 일선으로 복귀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역사적 명분을 잃고 세대교체로 인한 지속적인 개혁 발전도 꾀하지 못한 채 해방 이전의 성결교회와 별다를 바 없는 답보현상을 가져오게 하였다.
셋째, 6·25 한국전쟁은 한국성결교회가 1940년 10월에 들어와 일제에 의한 강제적인 선교사 추방을 통해 얻어진 정치적 자치권 행사를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지원을 받음으로 인해 동양선교회와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동양선교회와의 관계가 복원되었으나 해방이전과 같이 동양선교회 이사회의 일방적 지배를 받는 종속적 관계가 아닌 협력관계로 발전되어 갔다.
넷째, 6·25 한국전쟁은 성결교회로 하여금 전쟁을 치루고 난 뒤 이데올로기 중에 북한에 대한 적개심과 결부된 반공 이데올로기가 해방이후 보다 더욱 고착되는 결과를 갖게 하였다. 이것은 1956년 11회 총회에서 성결교회 교역자는 정치운동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안이 통상회(通常會)에서 논의되어 가결되었지만 자유당 정권과 이후 군사정권 시절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폭력 앞에서도 예언자적인 비판 기능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였다.
2) 발전적 제언
첫째,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와의 관계가 경제적인 지원으로 재개되었지만, 그 관계 설정은 과거와 같이 일반적인 정치적 종속적 관계가 아닌 주체적인 관계에서 상호 협력관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한국전쟁기간 그리고 그 이후 성결교회 재건에 있어서 동양선교회가 차지한 공헌은 교단 재기에 있어서 결정적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외국 선교부가 성결교회에 끼친 영향을 부정적인 면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에서도 평가하는 통합적 시각이 요청된다.
둘째,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성결교회는 주체적인 개혁을 추구하던 교단 수뇌급 인사들의 대거 상실로 인해 부일행각에 직, 간접적으로 앞장섰던 과거 리더십과의 단절을 통한 새로운 역사적 전기를 갖지 못하고 수구 중심의 보수 지향적인 상태에 다시 머물렀다. 성결교회는 과거의 역사적 반성과 함께 단계적인 혁신적인 세대교체를 통한 지도력 이양을 통해 미래 지향적으로 나가야함을 요청받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비단 과거 친일에 관한 문제와 결부된 것만은 아니다.
셋째, 6·25 한국전쟁으로 입은 한국성결교회의 피해는 단순히 건물 복구와 피해 상황 조사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피를 쏟은 순교자들의 신앙적 자세와 교훈을 배우고, 되새기는 실증적인 역사적 기록과 함께 이것을 보존, 계승, 확산시키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올해 5월 기성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된 한기채 목사가 총회장 공약으로 제시한 ‘성결교회 역사박물관 설립’문제는 그 의미가 실로 크다고 말할지 않을 수 없다.
비단 한국전쟁과 관련해서만 아니라 신사참배에 항거한 순교자들도 포함하여 기성과 예성 연합으로 손을 잡고 내실 있게 순교유적지 보존과 발굴, 사료 정리, 홍보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성결교회 역사유물관’을 건립하여 순교 신앙을 통한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함양하는 ‘성결교회 역사 바로 세우기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넷째,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북한지역의 성결교회가 완전히 강제 폐쇄, 말살됨으로 남한교회 중심의 성결교회 발전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남북의 정치적인 교류가 잦은 이 시점에 들어와 한국성결교회는 통일을 대비하여 북한성결교회 재건 매뉴얼을 양교단의 절충된 하나의 통합 단일안으로 만들어 단계적으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실행해 나가야 한다.
다섯째, 6·25 한국전쟁으로 인한 한국성결교회의 반공 이데올로기 고착이 교단분열의 한 요인이 된 것 뿐만 아니라 과거 독재 및 군사정권 하에서 정치적 횡포에 침묵하고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생한 점 그리고 지금도 공산 독재정권아래 고통 중에 있는 북한 동포(지하성도)의 자유와 인권문제에 등한시한 점에 대한 반성도 성결교회에 요청된다.
*이 글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역사신학논총』 2집(2000년)에 발표한 것을 재차 정리
정상운 목사
본지 논설위원,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