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하늘은 회색빛이다. 나무들은 벌써부터 곱디고운 단풍으로 물들고 이제 낙엽으로 떠나려 한다. 상강 서릿발 차가운 칼날에 놀란 붉은 장미는 피를 문 입술로 제자리를 지키려는 모습이 애처롭기조차 하다.
미처 따내지 못한 감들이 갈색으로 변하고 있는 감나무에 매달려 시들고, 호수는 찬바람에 떫게 물들고, 서리 맞은 국화는 벌써 그 총기를 잃었다. 들판에는 금싸래기 같은 깨를 쏟아낸 들깨 쭉정이가 덤불 되어 바람 따라 흩날린다. 물든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지면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고, 비라도 내리고 바람이라도 불면 어디 있어도 허허로운 11월이다. 이 계절은 무딘 감성을 깨우쳐 너도나도 시인이 되게 한다.
그러나 11월은 추수의 계절. 인고의 시간을 보낸 11월의 들판은 풍요로움이 가득하고 창고마다 기름진 은총이 향기롭기까지 하다. 저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이 어디 쉽게 되었을까?
봄부터 소쩍새는 그리도 울어 댔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울어댔다. 누님의 긴 방황의 시간이 있었고, 지난밤에는 무서리가 밤새 내렸고,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리고서야 드디어 핀 한 송이 국화꽃처럼 인고의 시간이 녹아 이 가을을 화려하고 여유롭게 하는 것이다. 땅 위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다 그렇다.
바울은 에베소를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의 세월 3년을 쏟았고,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고통에 몸서리치며 사망의 잔을 마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새 아침을 맞았다. 이 가을의 풍요와 아름다움도 그런 인고의 시간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가을에는 베푸신 은총에 감사의 두 손 모으고 나의 수고의 분량을 헤아려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수고했는가?
11월은 시인 나태주의 시 11월처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와 버렸고 /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 이다. 미처 다하지 못한 가을걷이를 마저 끝내려는 농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저리도 종종걸음일까?
상강이 지나고 나면 입동(立冬), 이제 긴 겨울이다. 수고의 땀으로 여름을 보내며 창고를 채운 개미는 긴 겨울에도 여유로울 것이다. 그러나 베짱이는 어떤가? 이제라도 남아있는 시간을 감사하며 씨 뿌리러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淸水 ehc3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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