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5) 물(죽는 의미) 세례라면 죽었다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령 세례라면 새 사람이 가지는 하나님의 영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면 천국가기까지의 ‘구원과 천국사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많은 고민을 한다. 흠 없이 버텨내기 위해 도덕, 윤리, 전도, 봉사로 구원을 지켜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무효가 되지 않게 하는 극히 소극적인 태도가 대개 우리의 신앙인들 모습일 것이다.
구원은 뭐냐? 옛 세상은 죽고 새로이 태어나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구원 이전의 세상은 사망의 왕이 지배했다.
잣대는 오로지 ‘잘 잘못’이 기준이다. 이에 비해 새 세상(구원받은)은 영생, 즉 끝없이 나가는 생명의 세상이다. 예수를 믿었는데 나는 왜 이러나? 십자가는 죽음의 세계와 어떻게 다른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한경직 목사님은 이 질문에 늘 자신은 “의인이 아닌 죄인이다”라고 하셨다. 아마 완벽하지 않아서 이런 답을 하셨을 것이다. 의인이라 함은 사망의 권세가 잡은 세상에서 영생의 권력을 잡는 것이다.
출애굽은 노예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서의 횡포와 억압에서 해방이 되어 자유인 신분으로 홍해를 건너 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물(홍해)에 들어가서 다 죽고(물세례) 나와서 자유인이 된 것이다.
자유와 책임, 도덕, 율법 모든 면에서 신분이 달라진 것이 출애굽이다. 로뎀 사건을 동원 해 본다. 구원을 받았는데 이게 뭐냐? 고단한 인생, 구원 받은 것에 대한 몰이해로 원망을 하자, 하나님께선 불뱀을 보내고 살려달라는 아우성에 장대에 불뱀을 달아서 보라고 한다. 예수도 십자가에 달려 ‘이것을 보면 다 산다‘ 하셨다.
십자가의 이해는 예수의 부활이자, 옛 시대의 멸망이다. (히 2;14~16) 종노릇을 놓아주시기 위해 사망 권세를 잡는다. 사망이 아직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 권세는 결국 죽음 밖에 만들지 못하고, 이 죽음이 최고의 권세다. 공포, 두려움, 의식, 비겁함, 어려움이 사망 권세인 반면에 우리 구원 받은 자의 길은 명예, 위대함, 자유, 기쁨이다.
예수가 로뎀에서의 장대처럼, 십자가에 달린 것은 구원 받은 자의 현실적 지혜다. 십자가를 볼 때, 생각을 해 보라, 우리는 영생이다. 수많은 실수가 우리를 만들어 왔고, 실패를 통해서 은혜와 유익을 만들고 겸손을 알게 했다. 우리 인생 자체가 힘겹다. 그러나 ’속고, 배신당하고.....,’ 라면 옛 세상에 속하는 삶이니 ‘나는 영생에 산다’라고 해야 한다.
(골 2;12~15) 세상권력의 정체를 밝히고, 그가 죄가 없음을 알고, 구원하러 온 사람을 죽였다. 죄는 모든 것을 사멸 시킨다.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용서, 회복, 기다림. 세상의 권력은 죽음으로 밖에 못 간다.
헛되고 그만인 것에 부활이 왔다. 세상은 자기가 이기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적대적 결과의 논리가 지배한다. 예수를 믿는 것이 뭔가? 우리 각자가 예수의 길을 따라가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십자가의 구원과 십자가의 현실. 눈물은 기적으로 한숨은 영광이기 위해선 삶의 그 어떤 부분도 십자가를 뺄 수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