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이 땅에 오심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실현 되었다. ‘만족’이라는 것은 이웃에서 빼앗아 오는 게 아니라 예수 안에서 허락 되어있다.(진리 위에 있는 예수) 즉, 우리의 능력으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이다.
세상은 적대적 결과를 요구한다. 자기가 이기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뭔가? 우리 개개인이 예수의 길을 따라가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용서와 사랑을 실현 하는 것이다.
현대를 살면서 세상의 통치와 예수 안에서의 것에 유혹에 혼란이 생긴다. 세상의 힘은 결국 서로 죽이는 것이다. 지위, 지식, 가진 것은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고 이웃과 담만 높이 쌓아 가게 하는데 사용이 된다. 교회는 뭘까? 초기 한국 기독교는 부흥위주로 시작 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설교, 봉사, 학교, 병원, 고아원, “저 사람들이 어떻게”라며 위대한 사역을 위해 고난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이 기이하게 보여 질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기준을 확인해야 한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처세와 운명을 살아 내어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승리와 영광은 값없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이건 온전히 과거를 보고 보복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세상이 절대 만들 수 없다. 오로지 공포 밖에 없고 실력이 없다. 이 공포와 절망 앞에 ‘인문학’이란 것이 등장했다.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를 믿는 특권을 그 가치 측면에서 한번 신중하게 곱씹어 봐야한다.
그 진정성을 가지고 내가 그분의 자녀라고 또 내가 걸어 온 길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 있습니다.”라며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서 해 낸다는 것을 증언 해 내어야 한다. 이런 각오와 준비로 신자로서의 길을 뚜벅 뚜벅 걸어 가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경쟁을 포기 하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신앙인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복이다.
시편 23편을 보면 세상의 힘이 있는 자는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진다. 세상의 거짓됨, 그것은 세상의 이치가 진리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답이 아니다.
답이 없는 것을 안고 살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 안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모습이어야 하며 우리 인생이 어떤 인생인가를 예수 안에서 찾는 것이 예수의 오심의 주제가 될 것이다.
신앙은 법과 규칙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어떻게 항복하느냐에 있다. 신앙을 논 할 때, 잘 잘못을 논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무엇을 누가 할 것인가? 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참여 시키는 것. 그렇게 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 주시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이 아닐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
고통, 울분, 괴로워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을 포기 하지 않고 절대 세상에게 내 인생과 운명을 넘겨주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책임 있는 신앙인의 삶으로 살겠다고. IN 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