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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훈 목사 [성결대학교 신학대학원장]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새 다이어리를 구입한다. 내가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는데 이제는 찾기가 쉽지 않아 적잖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요즈음에는 스마트폰을 통해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대세이지만 나는 여전히 손 글씨로 일상의 계획과 생각을 기록하는 것을 선호한다.

일정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다이어리는 나의 지난 삶의 흔적을 기억하는 시간여행의 통로가 된다. 어느덧 내 책상 서랍에는 수십 권의 다이어리가 빼곡하게 쌓여있다. 가끔 시간이 나면 나는 지난 다이어리들을 열어본다. 그 안에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의 추억, 내가 했던 중요한 작업의 과정,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느꼈던 생각의 자취들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그냥 흩어져 버렸을지도 모를 순간들이 의미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된 것이다.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뮬러는 일평생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그 위대함은 그에게 어떤 신통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조지 뮬러가 삶에서 기도했던 모든 순간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체험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쌓여 이루어진 거대한 자취이다. 오랜 시간 수련과 체험이 쌓이면 현재 시점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수’로 남는 법이니까.

여기에는 시간과 기록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나의 삶의 연대기를 지금 기억에 의존해 정리해 보자. 과연 몇 페이지나 쓸 수 있을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건의 파편들은 시간과 함께 대부분 사라져 간다. 오직 기록된 것만이 나의 자취를 증명해 준다. 역사적인 작업에서도 그 현장의 인물들과의 인터뷰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인물의 기억이 역사서술의 가장 큰 맹점이 되기도 한다.

기억은 언제나 쉽게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기억보단 기록을 더 중요하게 취급한다. 기록된 기억만이 그때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존하는 최선의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사진도 중요하지만, 문서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의 영감을 담아내기에 더 소중하다.

서양 학문의 근간이 되는 그리스 전통에서 ‘앎’이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인식론적인 이해를 추구한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은 “신은 어떤 존재인가”(Who God is)라는 대명제의 객관적 이해들이 정리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히브리 전통에서 하나님에 대한 앎은 “신이 하신 일”(What God has done)에 대한 역사를 중시한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그분이 내게 행하신 일을 망각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히브리 전통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역사를 상기한다. 신의 부재를 느끼는 현실적 고통에서도 이들은 역사 속 하나님을 기억하며 현 위기를 인내할 수 있었다.

명절 가정예배에서도 우리는 앞선 어른들의 신앙과 삶의 종적을 기억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매개는 그분들이 남기신 기록들이다. 할머니가 남기신 성경책과 아버지가 쓰셨던 옛 서적을 함께 읽고 나누며 산 자와 망자가 함께하는 초대교회 카타콤 예배와 코이노니아를 재현할 수 있었다.

현실의 꼼꼼한 일정 관리뿐 아니라, 내 자녀들이 나의 삶을 기억할 수 있도록 삶의 여정을 기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유성룡의 <징비록>처럼, 김구의 <백범일지>처럼, 다윗의 <시편>처럼, 솔직한 기록은 언제나 미래를 위한 소중한 지혜이니 말이다. 언젠가 나의 다이어리들을 내 딸에게 전할 생각이다. 나의 기록들은 적어도 내 아이들에겐 꽤 중요한 믿음의 유산이 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