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욕구불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감사할 조건이 없다고 한다. 행복지수가 적다. 왜 그럴까? 감사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3가지 질문과 답이 있다. ‘첫째,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늘 배우는 사람입니다. 둘째, 누가 강한 자입니까? 자신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셋째,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感謝)는 행복지수(幸福指數)의 바로미터가 된다.
감사가 많으면 행복지수가 올라가고, 감사가 적으면 행복지수가 내려간다. 누구든지 행복이 충만하기를 원한다면 범사에 감사하면 된다. 감사의 삶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생은 아름답다(Life is Beautiful!). 감사를 통하여 인생은 즐거운 것, 기쁨의 삶이라는 것, 행복한 생활임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전 5:18-19, 9:9).
감사는 관계의 행복이다.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자유와 평화의 세상이 되려면 서로의 막힌 미움의 담이 무너져야 한다. 불평등의 벽이 허물어져야 한다. 감사에 대하여 <허만 슈타인>은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는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서양의 금언 중에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 문제는 우리의 축복을 세어보는 문제이다.’라고 하였으며, <데이비드 스코퍼>는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고민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의 차이다.’라고 하였다. 감사를 통하여 모든 사람과 함께하는 것, 좋은 것을 나누는 것, 서로를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돌아보는 것,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보살펴주는 덕목이다.
감사는 형통(亨通)을, 불만은 불통(不通)이다. 조건적 감사가 아니라, 무조건적 감사, 상대적 감사 아니라, 절대적 감사이어야 한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감사하지 않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 노인과 젊은이,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이런 조건적인 상대 감사는 비교 대상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또한 이러한 상대 감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비난할 조건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는 절대 감사가 필요하다. 이것이 청교도의 정신이다
(Puritan's Spirit is Think & Thanks). 청교도들은 고난과 고통가운데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며 생각하고 사용하는 말이 ‘감사합니다(Thanks You)’이다. 감사치료법(Thank Therapy)은 입술의 선포이다(히 13:15, 빌 2:11, 엡 5:4). 불평과 불만의 마음을 감사의 마음으로, 상대적 감사를 절대적 감사로 변화시키는 것이 하늘의 능력이다.
인간은 두 개의 주머니가 있는데, 하나는 의식의 주머니요, 다른 하나는 무의식의 주머니이다. 그런데 기억(記憶)해야 할 것은 망각(妄覺)하고, 망각해야 할 것은 기억하니,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생각날 때가 많다. 우리의 좋지 못한 기억과 상처들은 은혜와 용서를 통하여 치유되고 회복된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
악령(惡靈)은 원한을 기억하게 하여 감사하지 못하게 하고 불평하게 하지만, 성령(聖靈)은 은혜를 기억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감사하게 하신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현재의 삶에 희망을 주시는 은총과 축복으로 찬양과 감사, 시와 노래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자.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감사가 넘치게 하므로 사회가 복되고 윤택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