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주준성 선교사
낯선 언어와 문화를 배워가며
2002년 4월, 우리 가족은 알바니아에 입국해 수도 티라나에서 1년간 언어를 배우며 정착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알바니아어는 한국에서는 배울 수 없는, 전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언어였습니다. 당시 인구 280만 명(인천광역시 인구와 비슷) 남짓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이 언어를 배우는 방법은 단 하나, 현지에서 부딪히며 익히는 것뿐이었습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번역 앱이 없던 아날로그 시대였습니다. 알바니아-영어 사전을 펼치고, 영어-한국어 사전을 번갈아 보며, 들은 단어의 뜻을 어렵게 유추해야 했습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정확히 이해한 걸까?” 하는 의심 속에서도 ‘자주 쓰다 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버텨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우리 부부는 두 아이를 함께 돌보며 언어를 익혀야 했습니다. 1년 6개월 된 첫째, 갓 100일을 넘긴 둘째를 키우며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아내에게는 매 순간이 한계를 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배우지 않으면, 더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에, 진도가 늦더라도 어떻게든 함께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외출이 어려워 학원 수업은 포기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 주 3~4회씩 개인 교습을 받으며 언어를 배워갔습니다.
복음은 설명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1년이 지나갈 무렵, 우리는 선교부 선임 선교사님의 요청으로 수도에서 약 3시간 떨어진 외곽 도시 페친(Peqin)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알바니아에서도 손꼽히는 보수적 문화의 무슬림 지역으로, 길거리 카페에서 여성의 모습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남성 우월주의 문화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여성들은 치마를 입고 집안일을 전담했으며, 속옷조차 남성들이 대신 구매해 전해주는 문화 속에서, 동양인 가정이 마을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곧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아이와 함께하는 우리의 모습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을 다소 누그러뜨렸고, 예상과 달리 소소한 배려와 따뜻한 시선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또 하나의 낯선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은, 복음이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중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생활 속 관계를 통한 접근은 문화적 저항을 최소화하고, 자연스럽게 복음이 스며들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했던 것은, 이 지역에 이미 세워진 ‘기쁨의 집 교회’에서 함께 사역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선임 선교사님이 개척한 이 교회에, 우리는 가정 단위로 처음 정착하여 사역을 돕게 되었고, 언어도 문화도 서툴렀지만, 함께 찬양하고 웃고 울며 공동체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청년들과 청소년들과 가까이 지내며 함께 살아낸 시간들은 지금도 마음 깊이 남아 있습니다.
어설픈 언어보다 더 깊이 다가간 것은 진심이었고, 설명보다 강했던 것은 함께 살아낸 믿음의 고백, 곧 복음이었습니다. 한때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아버지라 고백하던 그 공동체는, 지금도 제 마음속에 알바니아 사역의 첫 가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장 작은 것으로 가장 큰 위로를 주시는 주님
페친에서의 교회 사역이 어느덧 1년 가까이 되어가던 2003년 성탄절 무렵, 교회 청년들과 함께 행사 준비에 한창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교회에 나와 분주히 움직였고, 아내는 청소년들에게 율동을 가르치며 사역 중이었습니다.
두 아이는 한켠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무언가를 집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는지 급히 대문을 열고 나갔고, 한결이(3살)는 놀고 있던 30cm 자를 입에 문 채 “엄마!”를 외치며 뒤따라 나갔습니다. 시골집 철문처럼 자동으로 닫히는 대문에 자가 부딪히며, 자의 반대쪽이 한결이의 목젖 뒤편을 깊게 찔러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습니다.
놀란 아내의 비명이 울렸고, 저는 피를 흘리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당황했습니다. 페친에는 병원이 없어, 선임 선교사님과 함께 3시간 거리인 티라나로 급히 향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료 선교사님이 아이를 진찰하며 여러 의학 서적을 살폈지만, 한결이는 너무 어려 전신마취는 위험했고, 상처 부위는 국소마취도 쉽지 않았습니다. 수면유도제를 소량 먹였지만 긴장한 아이는 끝내 잠들지 않았고, 봉합은 무산되었습니다.
피는 서서히 멎었지만, 상처의 깊이나 회복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의료 선교사님은 조용히 제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살아가는 것에 불편함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겠네요.”
아픔에 울먹이는 아이를 안고 돌아오는 길, 제 안에는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지금, 왜 이 아이에게… 하나님, 왜입니까?”. 자정이 넘은 늦은 밤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아이를 끌어안고 다시 울었고, 둘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제 품에 안겨 웃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임 선교사님이 우체국에서 받아온 작은 박스를 내밀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성탄 선물 같아요.” 둘째가 포장을 뜯자, 그 안에는 선교 훈련을 받던 청년들이 보낸 작은 선물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겨울 모자, 목도리, 모래놀이 장난감, 그리고 고래밥 과자 한 상자. 아픔과 피로에 지친 한결이는 상자를 보자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빠, 이거 내 거야?” 그전까지 “아퍼, 아퍼...”를 반복하던 아이는, 고래밥을 하나씩 조심스레 입에 넣으며 미소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결이는 고래밥을 하루에 하나씩 비타민처럼 천천히 녹여 먹으며 회복해갔고, 상자에 그려진 큰 고래 그림을 오려 침대 머리맡에 붙였습니다. 작은 고래 그림들도 방 여기저기에 붙이며, 자신만의 치유 공간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날 이후, 선교 보고를 위해 강단에서 종종 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500원짜리 과자가 뭐라고… 하지만 그 ‘작은 마음’이 하나님 손에 들려질 때,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놀라운 은혜로 임하더군요. 무엇을 보내야 선교지에 도움이 될까 고민되실 때, 그 고민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통로입니다. 진심이 담긴 작은 손길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기적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작아 보여도, 하나님 손에 들려지면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됩니다. 지금도 저는 그날의 고래밥을 잊지 못합니다. 그 안에는 세상 어떤 의약품보다 강력한 ‘사랑’과 ‘치유의 복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