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이사장 임석순 목사)는 지난 27일 서울 광진구 중곡동 한국중앙교회에서 ‘순교 신앙을 이어받아 화해와 평화의 길로!’라는 주제로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주기철·이태석·김관주·김철훈·서용문·최봉석 목사 등 ‘평양 순교자들’의 추모예배를 드리고 이들의 유족들을 초청하여 간증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주기철 목사의 손서인 이윤호 목사(기독교치유상담원 원장)는 “주기철 목사는 아들 영해(당시 6살)와 함께 무학산에 자주 올라 기도했는데, 영해는 아버지의 울부짖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괜스레 슬퍼져서 엄숙해지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기도의 종, 말씀의 종이었던 주 목사의 목회의 구심점은 기도였고,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순교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기도가 있었던 덕분”이라고 전했다.
이태석 목사의 아들인 이승규 은퇴장로(대전대덕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아버지는 평양시내의 상수리교회와 신암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순교할 각오로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을 보살폈다. 그 후 김일성 공산당 정권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공산당이 퇴각을 할 때 아버님은 10월 11일 평양시내에서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어 쇠사슬로 묶인 채 동평양철도역 근처의 방공호 속에 쳐 박혀 놈들의 기관총에 맞아 40여명의 다른 교회지도자들과 함께 몰사 당했다.”고 밝혔다.
김관주 목사의 아들인 김명혁 목사(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상임고문, 한복협 회장)는 “아버지는 기독교 자유당 결성과 관련하여 평양에서 투옥되었다가 사동 탄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복역하게 됐다. 어머니와 함께 사동 탄광을 찾아가곤 했는데 죄수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뵌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철훈 목사의 사위인 이금세 장로(영세교회 은퇴장로)는 “김철훈 목사는 친구인 강태민과 함께 평양학생 만세운동의 주동이 되어, 숭실전문학교 전교생과 평양시내 12개 학생이 참가하는 대규모 학생 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그에게 1개월간의 처음 옥살이가 시작됐고 1948년 2월 산정현교회에 부임해 오직 교회의 부흥과 선교에만 매진하다가, 그해 6월 25일 서평양역 근처에서 공산당에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됐다”고 했다.
서용문 목사의 아들인 서광선 목사는 “아버지는 열정적인 목회자였다. 아버지는 교회를 개척했다 하면 부흥이 일어났다. 1년 안에 새로 예배당을 짓고, 그리고는 미련 없이 우리 어머니에게 이삿짐을 싸라고 명령하고 다음 날 아침 소달구지에 몇 개 안되는 짐 보따리를 실고 다음 마을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교회를 개척하고 1년 안에 예배당을 짓고, 다음 동네로 이사 가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되풀이했다”고 했다.
최봉석 목사의 일대기인 ‘오직 예수’를 쓴 정행업 목사(전 대전신학교 총장)는 “최봉석 목사님의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핍박과 옥중생활은 형언할 수 없는 형극의 길이었다.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그 수가 차차 줄어갔다. 30여명이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서 갖은 고문과 악행을 당하며 희생됐다. 최봉석 목사는 갖은 회유와 협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아니했다”고 했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침체에 빠져있지만 동양의 예루살렘인 평양에서 순교를 한 이분들의 순교의 피는 여전히 한국교회에 면면히 흐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