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제곤 목사 (합덕제일교회)

전쟁으로 인해 한쪽 눈을 잃은 왕이 있었다. 관공서마다 왕의 사진을 걸어놔야 했는데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때 왕이 생각해낸 것은 초상화였다. 잘 그려진 초상화를 걸어놓으면 사진보다는 자신의 약점이 덜 노출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유명한 화가 세 사람을 불러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물론 가장 잘 그린 사람에게 상을 줄 것도 약속했다. 화가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왕의 초상화를 그렸다.

첫 번째 화가는 양쪽 눈이 모두 정상적인 모습을 한 초상화를 그렸다. 보기에는 좋았지만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은 만족해하지 않았다.

두 번째 화가는 진실을 그렸다. 한쪽 눈은 건강한 눈을, 그리고 다른 한쪽 눈은 사실 그대로 애꾸눈을 그렸다. 왕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얼마나 마음이 불쾌했는지 그 화가가 그린 초상화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세 번째 화가는 왕이 앉아있는 의자 주변을 여러 바퀴 돌면서 깊이 생각하더니 초상화를 완성해서 왕 앞으로 가져왔다. 세 번째 화가가 그린 초상화를 보는 순간 왕에게서 전에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세 번째 화가는 왕의 눈을 보는 순간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결단을 내렸다. 옆모습을 그리자, 그것도 건강한 한쪽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 말이다. 물론 옆모습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기에 애꾸가 된 반대쪽 눈은 초상화에는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화가가 그린 초상화는 분명 사실을 그린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두 화가와는 달리 왕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는 건드리지 않고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목회 현장에서 사역할 때나 어떤 일을 하다보면 난처한 경우에 직면할 때가 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것 같고, 그렇다고 내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기에 주저하는 경우가 있다. 총회 실행위원이 되면서 전화를 받는 횟수가 많아졌다. 안부 전화면 얼마나 반갑고 기분이 좋겠는가? 평소에 가까이 했던 동역자의 전화라면 어떤 전화면 어떻겠는가?

그러나 실행위원 자격으로 받는 전화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실행위원회에서 처리될 안건과 연관된 분들의 전화가 대부분이다. 그런 분들의 전화 멘트는 대부분 비슷하다. 마치 대단한 권력을 가진 분들을 대하듯이 최고의 예의를 갖춘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하게 된다.

당사자의 전화라면 본인이 지지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 전화를 받으며 불쾌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예의 바른 그 모습에 존경심마저 들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도 아니면서 대변인의 입장에 선 분께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경우는 느끼는 감정이 좀 다르다. 썩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봐 스승이신 목사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을 지지해 준다는 말로 알아듣고 기분이 좋아서 전화를 끊지만 필자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반드시 지지해준다는 말은 한 적은 없다.

말 한 마디는 사람에게 용기가 될 수 있고, 희망을 줄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좌절에 빠뜨릴 수도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15:23)
교단 총회를 앞두고 있다. 선거 과열로 상처받는 동역자가 생길까 염려가 앞선다. 선거는 선거로 끝나야지 상대방에게 상처는 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대의원들이 자주 사용했으면 하는 말이 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공감이 갑니다.”